[학술신간]올해의 출판계를 돌아본다

  • 입력 2000년 12월 22일 18시 57분


<출판은 가장 중요한 문화 인프라의 하나다. 그러나 올 한해 한국의 출판계는 경제위기에 따른 매출 감소, 도서정가제 논란 등으로 인해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한국 출판의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한 해를 접으며 동아일보 ‘책의 향기’팀 기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한국 출판의 오늘을 짚어보고 내일을 전망해보았다. 아울러 ‘책의 향기’를 제작하면서 느꼈던 애환, 그동안 못다했던 가슴 속의 이야기들도 털어 놓았다. 대담 참가자는 유윤종 이광표 김형찬 윤정훈 기자. <편집자> >

△이광표〓올 한 해 ‘책의 향기’ 만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매일 얼굴을 맞대고 책을 고르며 서평을 써왔지만 대담을 위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니 기분이 새롭군요. 먼저 출판계의 한 해 흐름을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000년 한국 출판계는 도서정가제 논란으로 인해 말 그대로 파란만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유윤종〓도서정가제를 지키느냐, 할인을 하느냐를 놓고 논란이 뜨거웠죠. 제 개인적으론 책이라는 것은 문화적 공공재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여건이 열악한 출판계를 위해 당분간은 정가제가 지켜져야 한다고 보는데요.

△윤정훈〓정가제 폐지(할인)가 출판계에 궁극적으로 피해가 된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저의 개인적 생각입니다. 정가제 사수보다는 전근대적인 유통구조를 먼저 개선해야만 출판계와 소비자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고 봅니다.

△이〓현재로선 찬반이 팽팽한데, 지금 상황을 좀 점검해볼까요?

△윤〓출판사와 대형서점 중소서점들이 가칭 ‘출판유통협의회’라는 모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정가제 위반시 처벌에 관한 법규 개정안을 만들겠다고 합니다. 문화관광부도 개정안을 만들어오면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인터넷 서점과 소비자단체가 제외됐기 때문에 논란의 소지는 여전히 있습니다. 게다가 최근 공정거래위가 인터넷 할인서점에게 도서납품을 거부한 출판사들에 대해 시정명령을 내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실 정가제 논란은 하나도 진척되지 않은 셈입니다. 원점에 있어요.

△이〓무슨 대안이 없을지 한 번 찾아봅시다. 근본적으로는, 어려운 여건에서 양서를 내는 출판사들이 안정적으로 책을 만들 수 있는 분위기가 필요할텐데요.

△윤〓공공도서관이 의무적으로 양서 구입을 늘리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합니다.

△김형찬〓동의합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정가제든 할인제든 언젠가는 승부가 나겠죠. 그러나 출판을 문화 인프라라고 인정한다면, 시장논리만으로 해결하겠다는 생각은 곤란합니다. 시장논리와 별개로 학술서적과 같은 양서 출판을 국가 차원에서 지원하는 시스템을 갖춰야합니다. 가장 현실성이 높은 것은 공공도서관이 학술서적 구입을 늘리도록 의무화하는 것이죠. 양서로 인정된다면 초판 발행부수는 공공도서관에서 구입해주어야 합니다.

△유〓정부의 장기적인 안목과 제도적 장치가 없는 한 논란은 계속될 것입니다. 아울러 할인서점들도 끝없는 출혈경쟁을 지양해야 해요.

△윤〓김대중정부 초기에 출판유통개선을 위해 막대한 비용을 투자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군요. 공공 도서관의 학술서적 구입 비용에 더 투자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김〓도서관의 양서 구입이 늘어난다면 출판사들도 경쟁적으로 양서를 만들 겁니다.

△이〓자 그럼, 이번에는 e북 얘기를 해보죠. 사실 올해초 출판계는 e북에 대한 기대가 가득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우려로 바뀌었습니다.

△윤〓거품은 미국에서도 빠졌다고 봅니다. 올해초 최초의 e북을 출판해 화제를 모았던 미국 작가 스티븐 킹도 최근엔 전자출판은 시기상조라면서 e북 연재를 중단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아직은 시험 단계라고 봅니다.

△이〓지난 10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 가보니 e북에 대한 관심은 생각보다 적었습니다. e북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콘텐츠가 중요하다는 지적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윤〓지금까지는 소설이 e북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소설보다는 요리책, 어학교재, 백과사전 등 실용서가 더 적합하다고 봅니다. 동영상과 음성 등 멀티미디어를 활용할 수 있는 책들 말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해요.

△김〓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고 봅니다. 문자만 넣는 e북 단말기조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데….

△유〓하이퍼텍스트 멀티미디어 인터랙티비티를 기본으로 해야 합니다. 또 아직까지 e북이 성공하지 못한 데는 네티즌들이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정보는 모두 공짜로 생각하는 심리도 한몫한 것 같습니다. 돈 주고 e북을 사보는 것을 꺼려한다는 말이죠.

△이〓한 해 동안의 소감을 한 번 들어볼까요. 즐거웠던 일, 어렵고 아쉬웠던 일들이 많았을텐데요.

△유〓일생의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앗, 그렇게 심한 말을(일동 웃음).

△윤〓‘책의 향기’엔 학술분야의 역저를 소개하는 학술출판면이 있어 참 뿌듯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이번호엔 이 대담으로 인해 학술면이 빠지긴 했지만.

△이〓과학책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것도 ‘책의 향기’의 자랑이죠. 교양수학 책을 너무 자주 소개한다는 원성을 들을 정도였으니까요. 한 번은 ‘공룡대탐험’(창작과 비평사)이란 책을 보곤 뭐 어린이책이려니 하고 옆으로 치워놓았다가 자연과학을 전공한 윤정훈기자에게 들통난 적이 있었습니다. “아니 이렇게 좋은 책을” 하면서 저를 구박하더군요. 과학에 대한 저의 무지를 깨쳐준 윤 기자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김〓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지난 8월 ‘한국중세농업사연구’(지식산업사)라는 역저를 낸 김용섭 전 연세대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학자가 공부해서 책 내는 게 당연하지 어디 신문에 날 일이냐”면서 인터뷰를 사양하시더군요. 순간 숙연해졌습니다.

△이〓정말 좋은 책을 고르기 위해 무수히 토론을 하고 그 책의 서평기사를 쓰기 위해 마감날인 매주 목요일 거의 밤을 샜는데, 그래서 ‘책의 향기’가 아니라 ‘책의 단내’라고 부르곤 했지요. 언젠가 과학책 서평을 쓸 때였어요. 중요하고 의미있는 책임엔 틀림없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더 어려워지는 거예요. 시간은 흘러 동은 터오죠. 그 때는 정말 당혹스러웠습니다.

△김〓마감일 새벽, 기사를 쓰다가 ‘이 책은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다른 책을 골라야 할 때의 막막함이란….

△이〓그래서 결국엔 더 좋은 책을 골랐으니, 그것도 지나고보면 모두 즐거운 추억입니다.

△유〓대형서점의 신간서적 코너를 뒤지면서 신문사에 전달해오지 않은 책을 발굴해 올 때의 기쁨도 기억에 새롭습니다.

△윤〓그 책의 서평이 실렸을 때 출판사들의 반응은 놀라움 그 자체였죠.

△이〓자 그럼 이 쯤에서 대담을 마치고, 그동한 애정을 베풀어주신 모든 출판인들과 독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정리〓이광표기자>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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