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박재창/가신정치 끝내야 한다

  • 입력 2000년 12월 7일 18시 54분


가신(家臣) 퇴진론이 제기되었다. 못된 가신이나 가신 중심의 국정운영 양식이 오늘의 난국을 불러온 만큼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으로 처리하라는 주문이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가신끼리의 불협화음이 불러온 한시적 내홍(內訌)이라고 폄하하는 이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는 가신 퇴진론이 김대중 대통령 휘하의 여권에서 제기됐다는 사실을 간과한 결과다.

▼시스템 중심 국정관리를▼

김대통령이 누구인가? 가신과의 끈끈한 결속을 통해 엄혹한 권위주의 시대를 헤쳐왔고 집권에 성공했으며 여당을 관리하고 있는 분이다. 그런 만큼 김대통령에게 있어서 가신정치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다. 그런 김대통령에게 가신을 내치라고 했다면 이는 그의 모든 것을 버리거나 바꾸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

더욱이 가신 퇴진론이 여권에서 제기됐다는 사실은 가신에 의해 호위돼 온 김대통령의 권위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개혁과 변화를 선창해 온 김대통령 자신이 어느새 구체제의 한가운데 서게 된 셈이다. 그런 만큼 현재의 난국을 풀어가자면 김대통령 스스로가 매우 단호하고 결연하게 자신의 과거와 단절하는 길밖에 다른 대안이 없다.

무엇보다도 구식정치 스타일에서 벗어나야 한다. 엄혹한 권위주의 정권을 상대로 민주화 투쟁을 할 때는 운동화 끈을 고쳐 매고 뛰어 다니는 가신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정치적 동반자이자 정치적 조타수였을지도 모른다. 당시의 시대상황이 단선적이고 평면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민주화라는 단일 과제를 투쟁 차원에서만 다루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김대통령이 감당해야 하는 국정운영은 이와 전혀 근본적인 성격을 달리한다. 도대체 사람 몇이 뛰어다니면서 조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선 일감의 강도나 규모면에서 그렇다. 말로만 하고 끝낼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지속적인 관리를 통해 구체적인 성과물을 만들어 내야 하는 작업이다. 그런 만큼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 감당해도 일이 될까 말까한 형편이다.

여기에 더해 이 정권이 등장한 이후 제기된 과제들은 어느 것보다도 시스템 중심적인 관리를 필요로 하는 일들이었다. 단순한 현상유지가 아니라 사회의 기본틀을 다시 짜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남북문제만 해도 이 땅의 현대사 50년 이상을 견지해 온 반공 이데올로기를 허물고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하자는 것인 만큼 위기감과 긴장감이 위협적 수준일 수밖에 없다.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설득과 대화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제기되는 과제다. IMF체제 극복과제도 개발연대에 형성됐던 경제질서를 송두리째 재편해야 하는 것인 만큼 저항과 갈등이 엄청날 것은 뻔한 이치다. 여기에 경제상황까지 나쁘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만큼 국정관리 시스템이 감당해야 할 부하가 크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 정권의 국정관리 시스템은 처음부터 취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정치적 지지기반이 지역적으로 한정돼 있을 뿐만 아니라 소수당 정권이었다. 그런데 이 나라의 80% 이상을 형성한다던 보수층의 동요마저 자초한다면 어느 권력이 견딜 수 있겠는가.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이 정권의 이념적 토대인 서민층에 가장 큰 짐을 지웠다면 이 또한 권력의 기초를 흔드는 뇌관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를 가신 중심의 수공업적 기법으로 대처하고자 했다면, 이는 처음부터 참으로 무모한 일이었다.

▼김대통령 과거와 단절해야▼

결론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우선 김대통령이 구식정치의 틀에서 벗어나 시스템 중심의 국정관리로 전환해야 한다. 권한의 배분과 그에 따른 책임 부여가 이뤄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중립적 관리자가 돼야 하며, 이는 지역적 연고에서 떠나고 계층적 편향성이나 이념적 한계에서도 벗어나며 개인적 인연과도 절연해야 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과거와 단절하라는 주문에 다름이 아니다. 가신 퇴진만으로는 턱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과연 이 시점에서 김대통령이 이런 고뇌에 찬 선택에 나설 수 있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다. 우리 모두의 운명이 그의 선택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박 재 창(숙명여대 교수·의회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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