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원재/"내 이름은 제발…"

  • 입력 2000년 11월 14일 18시 28분


“기사에 제 이름을 쓰면 절대로 안 됩니다. 회사 이름이 나가도 곤란해요.”

경제현안에 대한 재계의 입장을 취재하다 보면 이런 부탁을 자주 듣는다.

김영호 전 산업자원부 장관의 정책비판 기사에 대한 소감을 밝힌 대기업 임원 A씨도 그랬다. 그는 “내 입장을 헤아려 달라”고 신신당부하면서 “만약 약속을 안 지키면 앞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왜 이름을 쓰면 안 되는지 물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B박사는 “피곤해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재계서열 10위권인 중견그룹 임원 C씨는 “가뜩이나 회사가 어려운데 공연히 불이익을 당할까 걱정이 돼서”라고 털어놓았다. 경제단체 임원 D씨는 “이 나라에서 관료를 적으로 만들고 기업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재계에서 ‘용감한 편’에 속하는 전경련 김석중 상무는 “민간의 피해의식은 낭패를 본 사례가 실제로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전경련이 재계 논리를 대변해 정부의 개혁방식을 비판하자 관료들이 발끈했다. 정부와 재계 관계가 악화되자 일부 그룹은 “정부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뭐 있느냐. 조용히 지내자”는 뜻을 전경련에 전달했다. 전경련은 입을 다물었다.

경제상황이 나빠지면서 오피니언 리더들의 ‘익명 선호증’은 더 심각해졌다. 우리 사회에서 언로가 차단되고 있는 것이다.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개진하지 못하는 당사자에게도 물론 책임이 있다. 관료들은 “비겁하게 뒷전에서 비판하지 말고 할말이 있으면 공개적으로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원인 제공자가 정부라는 점에서 우선 관(官)부터 반대 의견을 겸허하게 경청하는 자세를 가져야하지 않을까.

건전한 비판이 익명이라는 장막뒤로 숨은 사회는 분명 정상이 아니다.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이름을 되찾아주자.

<박원재 경제부 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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