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조성모論]'아시나요'는 和를 향한 仁의 노래

  • 입력 2000년 9월 17일 18시 37분


《대중스타는 시대를 읽는 중요한 키워드다. ‘비 대중문화적’으로 인식되는 각계 유명인사들이 대중예술과 대중문화인을 보는 시각은 어떤 것일까. 새기획 ‘충돌 두 文化’는 이질적 문화가 어떻게 충돌하면서 통합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

아시나요. 얼마나 사랑했는지…/그댈 향한 그리움의 힘으로 살아왔던 거죠…/슬픈 오늘이 같은 하늘 아래 그대와 내가 함께 서있는 마지막 날인 걸’

조성모군의 최근 인기곡 ‘아시나요’는 유가(儒家)의 입장에서 본다면 너와 나의 올바른 만남을 뜻하는 인(仁)의 개념을 노래한 것이다. 인은 육신을 통한 일시적 만남이 아니라 마음을 통한 만남을 말한다. 인을 통해 여러 사람들이 화합하는 화(和)를 이루고 이것을 토대로 큰 세상이 이뤄진다. 다만 조군이 이런 개념을 어디까지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아시나요’가 이성(異性)간의 사랑에만 머문다면 오히려 화(和)를 이루는데 장애가 된다.

조군은 이 노래 외에 ‘To Heaven(하늘을 향해)’ ‘슬픈 영혼식’ 등을 불렀다. 이들 노래도 만남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제목에서 하늘이나 혼을 내세운다. 원래 슬픔이라는 인간의 심성은 혼(魂)을 통해 하늘(신·神)에 이르게 된다. 그런 점에서 조군의 노래는 외면적으로는 하늘을 향해 있는 셈이다. 조군의 노래에는 장점이 있다. 그는 발라드풍의 노래를 가장 애절하게 부른다. 나는 이점을 강조하고 싶다. 노래가 희(喜) 노(怒) 애(哀) 락(樂)의 인정을 표현할 때 그 즐거움(樂)이 넘치면 선정성으로 번지고 그 성냄(怒)이 지나치면 폭력성으로 터져 나온다. 이때 그 선정성과 폭력성을 조율할 수 있는 심성의 요소가 참된 인정에서 나오는 슬픔이기에 조군의 애절함이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조군의 노래에 담긴 지나친 비애는 경계해야 한다. 논어에 낙이불음(樂而不淫·즐기되 지나치게 빠지지 말고) 애이불상(哀而不傷·슬퍼하되 자신을 상하게 하지 말라)이라고 했다. 조군은 ‘아시나요’에서 너와 나의 화(和)를 향한 인을 노래하지만 그 표현 방식이 자신과 듣는 이들에게 상처를 줘서는 안된다.

대중문화가 표현하는 희로애락은 모두 중용(中庸)의 도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중용은 자기 본성을 다듬고 심성을 올바르게 이끄는 도(道)에 이르는 길이다. 요즘 가수들이 노래하거나 음악을 만들 때 이처럼 중용의 도를 새겨야 한다.

음악은 예로부터 인간의 본성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했다. 논어에 흥어시(興於詩) 입어례(立於禮) 성어악(成於樂)이라고 했다. 인간의 본성이 시로써 일어나고 예로 정립되며 음악으로 완성된다는 뜻이다. 공자가 예로부터 시경과 아악을 강조한 데에는 음악이 사회 조율의 씨앗이자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즉 음악은 인화를 위한 것이고 음악을 통해 인간의 감성이 완성되고 풍속(문화)이 이뤄진다. 그만큼 노래하는 가수들이 대중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조군을 비롯해 요즘 젊은 가수들이 음악의 본질을 얼마나 아는지 궁금하다. 최근 가요를 보면 소리(聲)는 있되 음(音)이 없고 음은 있어도 악(樂)이 없다. 즉 겉으로 드러나는 소리는 온 사방을 울리고 있지만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는 참된 소리(음)이 없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댄스그룹의 춤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TV 프로그램 등에서 춤사위는 난무(亂舞)하지만 참된 춤은 볼 수 없다. 한민족은 예부터 영가무도(詠歌舞蹈·노래와 춤)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고 풍속을 교화시켰다. 동이전에는 한민족이 수지무지 족지도지(手之舞之 足之蹈之·손과 발의 움직임 자체가 무도)라고 했다. 춤을 가리키는 ‘무도(舞蹈)’의 어원이 바로 동이전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특히 노래도 마찬가지지만 춤에 있어서 율려(律呂·자연과 인간에 통하는 법칙 또는 리듬)를 강조하고 싶다. 율려를 통해 자연의 리듬을 타고 울리는 움직임(動)이 곧 춤동작으로 이어진다. 인간의 감성이 저절로 흘러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자연적 감흥이 곧 춤동작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젊은 가수들의 춤이 얼마나 인간의 본성을 완성시키는 것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이런 점에서 한국 대중문화는 중병을 앓고 있다. 노래속에 참된 음(音)이 없고 대중은 겉으로만 소리를 들을(廳)뿐, 참소리는 들을 수가 없다. 이런 현상이 청이불문(聽而不聞·듣되 진정 들을 수 없음)이다. 춤도 발광하는 몸짓을 볼(視) 수 있되 참된 율동(律動)은 볼 수 없다. 즉 시이불견(視而不見·보되 참모습을 보지 못함)인 것이다.

여기서 오늘날 TV의 노래 프로그램에서 껍데기만 보는 시청(視廳)이 난무하나 내 속에 보이지 않는 내 것을 보는 문화적 문견(聞見)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그 이유는 가수들이 음악의 본질을 미처 모르는데서 비롯된다. 나는 이를 자포자기(自暴自棄)로 본다. 무지한 가운데 자신이 하는 행위의 본질을 잃어버려 스스로를 버린다는 뜻이다.

또 가수들이 음악의 본질을 잘 알면 희로애락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중용을 지킬 수 있다. 중용은 희로애락의 지나침을 진정시킬 수 있는 본성의 회복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군은 ‘몸의 발광’을 자제하면서 나름대로 중용을 향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스럽다.

최창규(성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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