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교수의 법과 영화사이]전화위복

  • 입력 2000년 9월 7일 15시 48분


▼전화위복(Reversal of Fortune)(1990)▼

출연: Jeremy Irons(아카데미 주연상)/ Glenn Close/ Alan Dershowitz

감독: Barber Schroeder(감독상 지명)

원작 Alan Dershowitz

미국 전체를 통해 대중적 지명도가 가장 높은 법학자는 단연 알란 더쇼위츠(Alan Dershowitz)이다. 신문, 잡지, TV, 그가 등장하지 않는 대중매체는 없다. 대부분의 법학자들은 강의실과 연구실을 내왕하면서 "책 속의 법"을 탐구하며 일상을 보낼 때 더쇼위츠는 法書에 담긴 구절의 의미를 일반 지식인과 대중에게 전하고 법정에서 이를 확인하는 작업을 즐긴다. 전국 규모의 신문에 고정 칼럼을 가지고 있으며, 세인의 주목이 집중되는 법적 사건에서 텔레비전이 인터뷰하는 단골 해설자이다. 무수한 칼럼과 에세이의 저자인 그는 모든 면에서 법학교수의 전형을 깨는 사람이다. 더더구나 그는 법학자의 금기로까지 여기는 일심사건(trial)조차 담당하는 파격을 보인다.

누구도 그의 근면함을 필적하기 힘들다. 하버드 사상 최연소 정교수가 된 그는 동시에 뛰어난 실무 법률가이기도 하다. 더쇼위츠가 변론하는 의뢰인은 다양하다. 미아 패로나 마이크 타이슨 같은 주머니가 든든한 유명인사가 줄줄이 있는가 하면 이름 없는 포르노 배우와 극빈 흑인청년도 있다. 1970년대 말 음란물 시비로 세상을 소란하게 했던 포르노 영화 『목구멍 깊숙이』 (Deep Throat)의 주연배우 Harry Reems의 항소심 변론도 담당했다. 이 영화는 이른바 '하드 코어'(hardcore) 포르노 영화로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은 최초의 작품이었다. 단지 여주인공은 기막힌 오럴 섹스의 기법이 인구에 회자되는가하면, 애그뉴 부통령도 프랭크 시나트라가 초청한 명사들의 모임에서 이 작품을 보고 토론하기까지 했다.

더쇼위츠가 최초의 법률에세이집 형태로 출간한 『The Best Defense』(1983) 에서 밝힌 에피소드는 편견이 저지른 폭소를 자아내게 한다. 테네시 주에서 시작된 이 사건은 미국 전체의 보수, 진보의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싸구려 출연료를 받고 감독의 주문대로 영화에 출연한 죄밖에 없는 해리는 테네시 연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5년 징역의 위기에 처한다. 반전운동과 반권위 운동의 물결이 전 대학을 휩쓸면서 영화가 인기 절정에 이르고 해리는 일약 '포르노의 황제'이자 대학생의 영웅이 되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에 해리는 도움을 청하는 황급한 전화를 더쇼위츠에게 걸었고 두 사람은 하버드대 교정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한다. 정작 문제의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포르노의 황제'의 외모와 차림새에 대해 나름대로의 기대와 예견이 있었기에 쉽게 그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 믿었다. 마침 조깅에서 돌아온 참이라 청바지와 운동복 차림이었다. 이 차림으로 초면의 의뢰인을 대하는 게 다소 맘에 걸렸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오히려 친근감을 더해 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15분을 기다려도 약속장소에는 '포느로의 황제' 근처에 가는 사람도 없었다. 오직 한 사람, 조끼를 포함한 정장에 서류가방을 든 말끔하게 생긴 청년 한 사람뿐이었다. 전형적인 로스쿨 졸업반 학생의 모습이었다. 이런 차림은 이미 로펌에서 실무 수습을 시작한 하버드 로스쿨 3년생의 비공식 교복이었다. 행여 누군가 택시에서 내린 사람이 있는지 그 청년에게 물었다. 오래 전부터 서 있었는데 택시도 다른 사람도 보지 못했노라는 청년의 답이다. 말문이 터진 김에 자신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듯한 학생에게 혹시 도서관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느냐고 물었다.

"아니요, 여기서 더쇼위츠 교수님을 만나기로 했어요." "내가 바로 더쇼위츠 교수요." 두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온 말인즉 "아니, 당신이?" 설마하니 삼류 포르노 영화의 단역을 연상시키는 외모의 젊은 건달을 고명한 하버드 법대교수라고 해리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고정관념과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생생한 실례이다.

이렇듯, 초기에 더쇼위츠는 "인간 쓰레기"들의 변호를 도맡았고 지금도 주로 이들 삼류 인간들의 변론을 위해 애쓴다. 그의 지론인즉 명백히 죄를 저지른 인간, 만인에게 멸시 당하는 인간, 이길 가망이 거의 없는 사람을 변론하는 것이 법률가로서의 자신의 주된 사명이라는 것이다. 법의 절차는 외형적으로 공정하고 중립임에도 불구하고 불공정이 내재한 것이다. 미국의 정의 시스템은 "오로지 진실만" (whole truth)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일부진실에 기초한 제도이다. "to tell the truth, the whole truth and nothing but the truth" 법정에서의 서약은 오로지 증인에게만 적용되고 판사, 검사, 변호사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특히 유죄의 피고인을 변호하는 변호사의 입장에서는 진실을 막아야 하는 일이 주어지기도 하다. 엘리트 법조인에 대한 더쇼위츠의 불신은 자신의 모습을 되 비춰 보는 반사경이다. 한인섭의 말대로 동료 법률가에 대한 비판은 아픔을 자신에게 되돌리는 "부메랑 던지기" (『부메랑 던지기』프레스 21 (2000)인 것이다. 어쨌든 변호사의 지명도 때문에라도 더쇼위츠가 사건을 맡는 순간 무명의 의뢰인도 일약 유명인사가 된다. 영화 『전화위복』은 같은 제목의 책(1985)으로 출판한 바 있는 더쇼위츠의 재판일지를 영상으로 만든 것이다. 자신이 직접 영화에 출연하여 기록 속의 자신을 연기해 내어 '성격 배우'로서의 자질을 선보인 작품이기도 하다.

몰락한 유럽의 귀족 클라우스 폰 뷔로(Von Buro) 는 병상의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다. 아내 서니는 알콜 중독자, 마약 중독자이지만 엄청난 재력의 소유자다. 서니의 아버지가 막대한 액수의 유산을 남긴 것이다. 첫 남편은 무일푼의 왕족이었고 그와 사이에 두 아이를 두었다. 새 남편 클라우스는 냉정한 이성 덩어리로 뭉친, 돌처럼 차가운 인간이다. 내외는 서로 경멸하나 대외적으로는 이상적인 귀족 부부로 행세한다. 클라우스는 돈이, 서니는 누군가 크게 책잡히지 않는 동반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클라우스는 아내의 돈으로 놀고먹는 대신 자신의 일을 하고 싶지만 아내의 반대에 뜻을 이루지 못한다. 둘은 심각하게 이혼을 논의한다. 클라우스에게는 정부 알렉산드라가 있고 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한다.

1979년 크리스마스를 전후해서 서니가 의식불명상태에 들어가자 클라우스는 온종일 침대 옆에 머무른다. 서니의 충실한 하녀, 마리아는 걱정이 되어 의사를 부르자고 하나 클라우스는 단순한 숙취(宿醉) 때문이라며 안심시킨다. 더구나 아내가 혐오에 가까울 정도로 의사를 싫어하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서니가 호흡 곤란 중상을 보이자 비로소 의사를 부르고 다행스럽게 서니는 소생한다. 1년쯤 후 또다시 서니는 혼수상태에 들어가고 이번에는 영원히 깨어나지 못한다. 한겨울 저녁 창문이 활짝 열린 채 실내온도가 빙점 이하의 욕실에서 반나 의식불명의 상태로 발견된 것이다. 마리아는 클라우스를 의심하여 서니의 두 자녀에게 의혹의 사실을 귀띔한다. 남매는 변호사를 고용하여 클라우스의 방을 수색케 하여 검정색 가방 속에서 주사기와 인슐린 약병을 발견한다. 한 때 의사였지만 클라우스는 오랫동안 시술을 하지 않았고 집안에 당뇨병 환자도 없었다. 클라우스는 살인예비죄로 기소되어 유죄의 평결 끝에 15년 징역을 선고받았다. 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정부(情婦) 알렉산드라를 포함하여 누구도 클라우스의 유죄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란 더쇼위츠 교수의 등장으로 국면이 전환된다. 교수는 무료로 맡은 흑인 극빈자의 사형사건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거액의 수임료를 받고 클라우스의 항소심 변호사가 되어 휘하의 변호사와 학생으로 변론 팀을 짠다. 일부 조수는 의뢰인과 사건의 성격을 문제삼아 주저하나 교수의 강한 통솔력에 굴복한다. 합숙 훈련을 불사하는 강도 높은 훈련 끝에 팀은 일사불란한 체제를 갖춘다. 그러나 모든 증거가 불리하기 짝이 없다. 파경상태에 섰던 결혼생활, 간병인과 클라우스 자신의 정부(情婦)의 입에서 나온 결정적으로 불리한 증언들, 재산 처리를 둘러싼 의혹, 피고인의 거만한 태도. 이 모든 것들이 피고인의 변호사로서는 극복하기 힘든 장애였다.

클라우스의 주장은 서니가 약물 오용으로 사망한 것이라는 것이다. 문제의 검정색 가방은 클라우스 자신의 것이 아니라 서니의 것이고 내용물도 모두 서니가 쓰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번연한 거짓말임을 아는 더쇼위츠는 클라우스에게 닥치라고 호통친다. 이렇게 편견을 가지고 출발한 변호사는 사건을 깊숙히 파고들면서 의뢰인의 무죄를 확신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클라우스의 차가운 품위와 절제된 언행에서 인간적인 매력마저도 느끼게 된다.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제러미 아이언tm의 연기가 클라우스를 차가운 이성의 화신으로 완벽하게 재현한다.

법률심인 항소심에서는 배심이 그릇된 평결을 내렸다는 주장만으로 항소가 성립되지 않는다. 항소심은 사실심이 아니라 법률심이다. 사실의 판단은 배심의 권한이다. 설사 평결이 진실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도리가 없다. 사법주권은 국민의 몫이고 국민의 이름으로 지역공동체의 대표가 내린 결정이기 때문이다. 더쇼위츠는 법의 기술적인 하자(瑕疵) 뿐만 아니라 클라우스의 무고함을 입증하는 새로운 증거를 로드 아일랜드 대법원에 제시해야만 원심을 파기할 명분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변론 팀은 클라우스가 아내의 팔에 인슐린 주사를 놓지 않았다는 증거를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또한 유족이 고용한 변호사와 경찰의 압수, 수색과정이 헌법의 원칙을 위반한 것이 밝혀진다. 경찰의 수색과정이 너무나 졸속이어서 압수한 품목의 상세한 목록조차 작성되지 않았다. 실제로 검정색 가방 속에 무엇이 들어있었는지도, 어디에서 수집한 증거인지조차도 명확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약병의 라벨조차도 떨어져 있었기에 내용물의 진위를 확인할 수도 없었다. 만약 인슐린을 주사하기 위해 바늘을 사용했더라면 주사한 후에는 다시 소독을 하는 것이 상식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사 바늘에 인슐린이 검출된 것은 누군가가 사후에 클라우스에게 죄를 덮어씌우기 위해 한 짓이라고 의심할 수 있다. 더쇼위츠 팀은 또 다른 의학적 과학적 증거를 발견해 냈다. 로드 아일랜드 대법원은 처음에는 변론 팀이 제시하는 새로운 증거를 항소심에서 논의하기를 거부하는 입장을 취했다. 사실심의 심리는 너무나 명백한 오류, 즉 법의 오류가 아니면 논의하지 않는 것이 법률심의 대원칙인 것이다. 그러나 더쇼비츠 팀의 강력한 설득이 주효하여 마침내 원심을 번복하여 새로운 사실심을 열 것을 명령했다.

주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원심에서 서니의 자녀에게 고용되어 검정색 가방을 검사한 변호사의 노트를 공개하지 않도록 한 원심의 결정은 명백한 오류였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라와 쿠 변호인 사이의 대화 내용은 "변호인-의뢰인 사이의 특권" (attorney-client privilege)에 해당하지만 일단 그 사실을 경찰에 보고한 순간 특권을 포기한 것이라는 법리였다.

둘째, 불법의 압수, 수색과정이다. 헌법 수정 제4조는 주 정부의 공무원으로 하여금 불법의 압수, 수색을 못하도록 금지할 뿐, 사인의 행위를 규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서니의 유자녀와 그 변호인이 행한 수색은 헌법을 위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법원은 이 법리에 뜻밖의 변용을 가했다. 문제의 가방을 넘겨받은 경찰이 수색을 위해 가방을 열기 전에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발급 받지 않은 것은 명백한 위법이라는 것이었다. 더쇼위츠 자신도 이러한 법원의 판결에 놀랐다고 책에서 쓰고 있다. 사실인즉, 자신도 항소이유서에 이러한 주장을 담았다가 너무나 억지 같아서 빼 버릴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었다고 고백했다.

새로 열린 사실심에서 배심은 클라우스의 무죄가 확정되었다. 모든 상황증거의 신빙성이 "합리적인 의심을" 극복할 정도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클라우스는 거액의 재산과 자유를 얻었고 교수와 학생은 상당한 연구비와 현장실습의 경험을 얻었다. 그리고 국민은 또 하나의 유전무죄의 사례를 체험했다.

<서울대 법대교수> ahnkw@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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