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오연천/통폐합 해야 될 기금 많다

  • 입력 2000년 8월 31일 18시 32분


정부 산하 62개 공공기금의 부실운영으로 국민의 주머니 돈이 낭비되고 있음은 결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운영규모가 200조원에 육박하는 방대한 공공기금의 부실운영은 80년대이래 거의 연례행사처럼 지적돼온 고질적인 개혁과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땜질식 처방에 그쳤을 뿐 근본적 문제해결 노력은 미루어져 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획예산처가 중심이 돼 우리 재정의 환부를 치유하기 위해 스스로 공공기금의 부실을 공론화했다는 점이다.

원론적 입장에서 보면 공공기금은 예산과 달리 복잡한 편성과 국회심의, 의결을 거치지 않아 신축적 운영이 가능하므로 경제정책 또는 사회정책적 목표를 유연하게 달성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점을 편법적으로 활용해 재원을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고 설치한다든지, 우선 순위에 어긋나는 자금 지원을 한다든지, 파행적 자금운영이 근절되지 않는다면 상당수 공공기금의 존재 자체가 국가재정의 이중구조를 심화시키고 국민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웬만한 학교 동창회의 기금 조성이나 운용의 경우만 해도 수월치 않은 절차와 검증을 거치고 있다. 이런 추세에 비춰볼 때 방대한 국민 부담으로 직결되는 도덕적 해이가 방치되어왔다는 사실은 국민의 정부가 역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공공부문 개혁의 의지를 무색케 한다. 이제부터라도 재정, 예산당국은 임기응변적 처방에 그치지 않고 재정개혁의 차원에서 공공기금 문제를 근원적으로 풀어나가기 위한 구체적 의제설정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우선 상당수 부처가 자신의 행정목표 달성에 도움이 된다는 명분 아래 설립 운영하고 있는 사업성 기금의 경우 설립목표가 애매하거나 지원의 효과가 미미한 기금들은 과감하게폐지하고 이와 함께 유사한 기금은 통합해야 한다.

이를 위해 관련 행정부처는 ‘소관업무를 제대로 추진하자면 재원보조가 가능한 기금 하나 정도는 차고 있어야 할 것 아니냐’는 안일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경상적 경비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기금은 이 기회에철폐하고 그에 상응하는 일반회계예산으로 전환하거나 각종 융자사업기금을 재정융자특별회계로 한데 묶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국민연금기금, 고용안정기금 등 국민 대다수가 적립하여 운영하는 적립성 기금의 경우 그 기여금은 세금의 형태가 아니지만 사실상 세금에 해당되는 준조세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금의 부실은 즉각 국민 부담으로 돌아가고 장기적으로 기금 잠식을 초래해 재정위기의 단초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다수 적립성 기금의 재원조달방식과 기금 잠식에 대한 대처방안, 예산으로부터의 보완방식 등 기금 체계의 토대를 원점에서 재점검할 필요가 크다. 국민 경제적 심각성에 비추어 별도의 예산정책적 배려가 불가피한 기금의 경우 현재와 같은 책임 소재가 분명하지 않은 어정쩡한 의사결정 양태를 탈피해 국회의 심의를 거치도록 함으로써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공공부문 개혁의 상징적 노력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일부 핵심 적립성 기금의 적립과 운영을 아웃소싱함으로써 기금의 경쟁성과 투명성을 보강하는 방안도 고려해 봄직하다. 이번 예산국회를 앞두고서 행정부 차원에서라도 기금의 조성과 운영을 범정부적 차원에서 실효성 있게 조정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가동하고, 내년부터 이를 점검하기 위한 상설 기금평가단의 기능을 강화하는 작업이 조속히 진행되어야 한다.

공공기금 문제를 포함한 재정개혁 과제를 다루는 데 관련부처나 국회, 정치권 등은 ‘자신의 소관업무는 예외이어야 한다’는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국민 경제적 관점에서 균형 있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 무엇보다 긴요하다.

‘부모를 상해한 사람은 용서할 수 있어도 자신의 돈을 빼앗은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마키아벨리의 말을 기억하면서.

오연천(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