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김탁환의 대중문화 째려보기]아름다운 청년, 서태지님께

  • 입력 2000년 8월 22일 09시 51분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싯귀가 있지요. 96년 1월31일 태지님은 '더이상 노래를 만들 수 없을 정도로 지쳤기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라지고 싶다'고 은퇴를 선언하였습니다. 정상에 오른 가수로서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기에 쉬운 결정은 아니었겠지요. 그리고 4년7개월이 흘렀고 태지님은 컴백을 선언하였습니다. 돌아올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돌아오는 청년의 앞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보여주기 위함일까요?

1997년에 발표된 시나위의 6집 앨범에 수록된 '은퇴선언'이란 노래를 태지님도 들어보셨겠지요? 한 동안 그 노래는 태지님을 빗대어 작곡되었다는 풍문이 돌았습니다. 보컬 김바다의 약간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에 실려 '너희들의 슬픔이면 나에겐 힘이 돼 기다림에 지칠 때면 다시 돌아올 꺼야'란 노랫말이 귓전을 울립니다. 솔직히 지금까지 이런 의심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게 사실이지요.

그러나 4년7개월은 그런 얄팍한 수작을 부리기엔 너무 긴 시간이군요. 태지님도 내년이면 서른 살. 이십대 후반을 머나먼 이국땅에서 홀로 보낸 겁니다. 도대체 태지님은 무슨 생각을 하며 그 고독의 순간들을 견뎠나요?

잠깐 문학동네 이야기를 할까요. 과거 한때 외국 유학을 다녀온 연구자들 중에는 서구라파에서 유행하는 최신 이론으로 지적 우위를 점하려던 이들이 있었지요. 3년에서 5년 후면 들통이 날 외국 석학의 논리를 버젓이 자신의 것인 양 뽐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터넷을 비롯한 통신수단의 발달로 인하여 이런 식의 지적 사기는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러나 대중음악동네에서 오히려 외국 유학파 뿐만 아니라 교포들의 득세가 두드러졌습니다. 대중음악이란 것이 결국 서양음악이고보니, 미국을 비롯한 소위 본토의 '감(感)'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논리입니다. '업타운'이나 '드렁큰 타이거'가 대표적인 예이겠지요. 4년이 넘도록 그곳에서 살았으니, 그곳 음악의 영향을 받았을 테고 또 구태여 그런 영향 자체를 거부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번 앨범이 단순히 태지님이 미국에서 익힌 '감(感)'을 소개하는 자리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지금까지 태지님의 음악은 솜씨 자랑 이상의 의미가 있었으니까요.

노래 한 곡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태지님이 얼마나 노력하는가는 음악동료인 양현석님의 인터뷰를 통해 이미 널리 공중파를 탄 적이 있습니다. '테이크 1' 이후 2년 동안이나 음악을 만들었다니 이번에도 역시 완성도가 높은 앨범이 되겠지요. 그러나 저는 거기에 덧붙여 태지님의 '청춘'을 이번 앨범에서 확인하고 싶습니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태지님이 발표한 노래들은 10대들의 정서를 대변했습니다. '난 알아요'부터 '하여가'나 '발해를 꿈꾸며', '교실이데아'와 '컴백홈'에 이르기까지, 그 속에는 태지님의 10대 체험과 그 노래를 듣는 10대들의 경험이 굳건하게 하나로 결합해 있지요. 대중음악의 주소비층으로 10대를 끌어들인 장본인이 태지님이라는 평가는 이런 까닭입니다.

그러나 이제 태지님의 노래를 듣고 열광하던 그 10대는 없습니다. 얼마 전 가수 이정현이 '서세원쇼'에 나와서 중고등학교 시절 가장 좋아했던 노래라며 태지님의 '컴백홈'을 불렀지요. 태지님이 서른 살에 다가가는 동안 태지님을 아끼며 기다리던 10대 팬들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된 겁니다.

이제 태지님은 스무 살 빛나는 청년의 노래를 만들고 불러야 합니다. 열 살이나 어린 중고등학생들의 고민이 스물아홉 청년 '정현철'의 고민은 더 이상 아닐 겁니다. 가수로서 활동하던 20대 초반의 고뇌와 미국에서 보낸 20대 중후반의 깨달음을 이번 앨범을 통해 확인하고 싶습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나 이승환의 '가족'을 들으며 느꼈던 감동을 태지님을 통해서도 맛보고 싶습니다. 물론 태지님에게는 태지님만의 방식이 있겠지요. '최선을 다한 음악'이라는 태지님의 자신감 속에 이런 부분까지 포함되었으면 좋겠습니다.

9월이 기다려집니다. 아름다운 20대 청년 서태지를 만나고 싶습니다.

소설가 김탁환(건양대 교수) tagtag@kytis.ko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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