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방송독립과 장관의 '월권' 시비

  • 입력 2000년 8월 3일 19시 05분


요즘 지상파 TV가 보여주고 있는 과도한 선정성과 폭력성은 이 시점에서 누구라도 나서 제기했어야 할 문제였다. 며칠 전 한 TV에선 여성 출연자가 물 속으로 뛰어드는 과정에서 브래지어가 올라가 가슴이 드러나는 장면이 그대로 방영될 정도였다.

그래서 엊그제 박지원문화관광부장관이 강경한 어조로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밝힌 것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박장관은 방송 정책 분야의 주무장관이므로 문제 제기나 방향 제시는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박장관의 발언 가운데 ‘장관직을 걸고’라는 표현이나 단정적으로 TV의 선정성과 폭력성을 없애겠다고 말한 것 등은 우선 격(格)에 맞지 않는다고 본다. 그 이유는 방송 정책의 최고 집행기구로 방송위원회라는 곳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문화부가 직접 나서 일을 해결하겠다는 투의 언급은 충분히 ‘월권행위’로 비칠 수 있다. 나아가 과거 정권에서와 같은 ‘방송 장악’ 의도와 연관지어 시비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박장관의 발언이 있은 후 불과 몇시간 뒤 방송위원회 위원장과 방송 3사 사장들이 사전 교감이라도 있었던 듯 지지 의사를 표명한 것도 지극히 구시대적인 모습이다. 방송위원회로서는 자신들이 마땅히 제기했어야 할 사안을 문화부에 선수를 빼앗긴 꼴이며 방송사 사장들도 기다렸다는 듯 박장관의 발언을 한목소리로 지지를 결의한 모양새는 아무래도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그것을 떠올리게 했다.

5년여 동안 토론 끝에 통합방송법을 제정하고 새 방송위원회를 만든 것은 방송의 독립성 확보가 가장 큰 목적이었다. 예를 들어 이번 같은 선정성 폭력성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방송위원회가 외부의 입김에 영향받지 말고 독자적으로 문제를 풀어 가라는 것이다. 그러려면 방송위원회는 당당한 자세와 권위를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안에 대해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모습을 보인 방송위원회의 자세는 실망스럽다.

방송의 선정성과 폭력성 문제는 일시적인 바람몰이나 구호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과거 정권에서도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여러 번 있었으나 흐지부지되고 말았던 것은 그 밑바닥에 시청률 경쟁이라는 구조적 과제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난제를 풀기 위해서라도 방송위원회는 주어진 권한을 토대로 스스로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

정부도 방송위원회의 독립과 관련해 오해를 살 만한 행위는 자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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