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충식]두 갈래 亡兆

  • 입력 2000년 7월 14일 18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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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에 거슬리지만 외국인의 한 마디가 그럴 듯하다. ‘우리’ 끼리는 절박하게 느끼지 못하는 한국의 속사정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서다. “한국사람들이 흔히 쓰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속담은 위선적이다. 윗물이 맑지 않으면 아랫물은 언제나 책임이 없다는 식이다. 윗물에 관계없이 아랫물이라도 맑아지는 것이 왜 나쁜가.”

한국 생활이 20년이 넘는 한 외국 기자의 말이다. 마냥 윗물 타령만 하고, ‘내 탓’에는 고개를 돌려버리는 아랫물의 무책임과 위선이 실상은 더 큰 문제라는 비판이다. YS정권 때 ‘윗물 맑기 운동’이라는 어법에도 안 맞는 이상한 구호가 나온 것을 생각해 본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던가. 대통령은 칼국수만 먹었다지만, 그의 코밑에서 보좌하던 청와대 1부속실장은 수억원대 뇌물을 챙겨 감옥에 갔다.

아랫물이 제멋대로 흐려지면 도리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물론 윗물이 깨끗하게 수범(垂範)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그래야 아랫물이 깨끗해질 가능성도 높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윗물이 제 아무리 맑게 흘러도 아랫물이 스스로 타락하면 썩어 가는 것 또한 막기 어려운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더구나 현대 사회는 위아래 신분이 고정된 옛날과는 다르다. 시골 섬 소년들이 대통령도 되고, 국회의원이 택시 운전도 하는 식으로 출신 신분과 직업 변동이 무상(無常)하다. 이런 시대에 윗물 아랫물은 영원히 따로 놀고 섞일 수 없는 처지로 전제해서, 윗물의 무한책임만을 강조하고 아랫물의 책임을 한없이 감해 주는 것은 이상하다.

금융 파업의 소란 속에서도 그런 ‘아랫물 의식’을 읽게 된다. ‘금융 개혁이 국가 신인도와 경제 회생에도 절대 필요한 건 안다. 공적 자금을 쏟아부은 정부가 쌓여만 가는 부실을 걱정하고 나서는 것도 알겠다. 그러나 은행을 은행원이 망쳤나?과거 부실 대출 압력을 넣은 나쁜 정치가 은행을 껍데기로 만들었다. 금융지주회사나 합병이란 것이 바로 또 은행원 잘라내기 아니냐. 그러니 우리가 살기 위해선 국민 불편이고 뭐고 간에 파업을 안할 수 없다.’

의사들의 폐업 소동도 마찬가지다. ‘항생제를 비롯한 의약품 오남용이 가장 심한 나라가 한국이라는 것도 안다. 주사제 소비 1위도 국민 건강에 좋을 리 없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낮은 의료수가 속에 의사는 약 안 팔면 어찌 살란 말이냐. 정부는 의사도 약사도 국민도 싫어하는 쓸데없는 짓을 한다. 무슨 놈의 건수 올리기 같은 의료 개혁 타령이냐. 의사도 노동자처럼 머리띠 두르고 거리에 나서자.’

대중사회는 구조적으로 교통 의료 금융 에너지 통신같은 기간 분야 종사자들에게 일종의 ‘거부 능력’을 갖게 한다. 그 종사자들이 뭉쳐 국민의 생명과 편의를 볼모 삼아 파업을 강행하면 그 파장은 즉각적이고 심대한 피해로 이어진다. 이런 비토 능력을, 저마다 행사하고 나서면 어떻게 될까. 국가는 이들 기능집단의 힘에 휘둘려 총체적인 이해 조절이나 통합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생각만 해도 아뜩한 망조(亡兆)다.

나라건 회사건 망하는 코스는 다 같다. ‘아래’가 제 몫을 찾아 각기 제 손의 무기 ‘은행거래’ ‘질병 치료’ 혹은 칼 낫 같은 것을 휘두르고, ‘위’가 앞날을 내다보지 못한 채 우왕좌왕 내분에 휩싸이면 벌써 기울고 있다는 징조다. 아래는 ‘위’만 탓할 뿐 그들의 불법 아우성은 아무리 지나쳐도 자구책이요 정당한 것이라고 한다.

가뜩이나 정치는 수범할 게 없는 기대 불능의 ‘윗물’임을 확인해 준다. 13일 국회는 야당의원의 부질없는 ‘청와대 친북’발언으로 욕설과 고함으로 지샜다. 남북관계의 앞날을 이성적으로 헤아리고 냉철하게 대응하자는 지혜로운 자세는 결코 아니다. 정국 주도를 겨냥한 당리 정략으로 남북 대결보다 더 불꽃 튀는 남남 대결에 집착한다. 금융파업 의료대란 같은 ‘아랫물’의 무모함 어리석음을 나무랄 뿐 정작 자기들끼리의 죽기 살기 싸움은 더 하다.

구한말의 망국도, IMF난국도 설마설마 하며 우리 안에서 맹렬히 다투는 사이 다가왔다. 벌써 경기가 고점을 지나 내리막이며, 더 냉각되면 구조조정이 어려워지고 경제 파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한국개발연구원의 경고가 나왔다. 조짐을 알고도 나락으로 빠진 것이 참으로 몇 차례였던가?

김충식<논설위원>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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