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기전 해프닝] 18급도 웃을 '어이없는 실수'

  • 입력 2000년 7월 11일 19시 15분


《프로기사도 인간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도 한다. 그것도 보통 실수가 아니라 아마추어 18급도 저지르지 않는 실수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프로기사들은 ‘귀신에 홀렸다’고 말한다. 프로기사라면 1초만 생각해도 두지 않을 수를 태연히 둬 버렸기 때문이다.

귀의 간단한 사활을 착각하거나 축을 깜빡하는 것은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더 심하게는 단수가 되는 공배에 돌을 놓거나 자기 집을 메우는 등 보는 이의 눈을 의심스럽게 하는 경우도 있다.

올 상반기중 국내외 프로기전에서 벌어진 각종 해프닝을 감상해보자.》

▼12기 기성전 도전 1국▼

오래만에 타이틀전에 나선 최규병(崔珪昞) 9단. 최9단은 당시 이창호(李昌鎬) 9단에게 16연패 중이었다. 너무 부담이 컸던 탓인지 초반 포석에서 형세를 그르쳤다. 반상에는 절망의 그림자만이 가득하고 이9단의 끝내기 솜씨를 미뤄볼 때 도저히 역전은 불가능. ‘역시 이창호의 벽은 넘기 힘든 건가’하는 자조의 목소리가 최9단의 가슴을 메아리칠 무렵. 1도를 보자. 흑(최9단)이 끝내기를 위해 1에 치중했을 때 백이 2로 귀를 넘자고 한 것이 패착. 3으로 차단하고 5로 뒷수를 메꾸자 귀의 백이 허망하게 죽어버렸다. 이후 가∼다에 이어 라의 맥점으로 백 사망. 최9단은 귀중한 1승을 건졌다.

▼55기 본인방전 도전 1국▼

혼인보(本因坊) 조선진 9단(흑)과 왕밍완(王銘琬) 9단의 대국.이틀걸이 8시간 바둑의 첫날. 흑이 2도의 1로 밀어올리자 백은 2로 힘차게 뻗었다. 왕9단은 2로 뻗어 중앙을 백이 제압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시각 검토실 기사들은 모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흑 3이하 축이었기 때문이었다. 상대인 조 9단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흑 3,5에 이어 7로 몰았다. 흑 7을 보자마자 축임을 깨달은 왕 9단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 왕9단은 4분 정도 그냥 앉아있었다. 너무 어처구니 없는 실수여서 자책과 후회보다 그저 넋을 잃었다. 그는 문득 잠에서 깬 듯 돌을 던졌다.

▼4회 잉창치배 16강전▼

일본의 아와지 슈조(淡路修三) 9단과 중국의 마샤오춘(馬曉春) 9단이 만났다. 바둑을 다 두었다. 남은 공배도 1과 ‘가’ 자리의 딱 두 곳. 형세는 백을 든 아와지9단이 조금 남는 바둑. 이 때 아와지 9단이 귀신에 홀린 듯 백 1에 둔다. ‘가’ 자리에 메꾼다는 것을 그만 손이 잘못 나간 것. 아와지 9단의 손에서 바둑돌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9단이 번개처럼 흑 2의 자리를 찍어 눌렀다. 졸지에 백 10여점이 우수수 떨어졌다. 얼굴이 벌개진 아와지 9단. 18급 인들 이런 실수를 할 수 없었다. 프로바둑에선 일수불퇴. 마 9단의 탈락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던 검토실의 중국 기사들은 순간 환호성을 질렀다. 승부는 냉혹한 법이다.

▼10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 결승2국▼

이세돌 3단의 형 이상훈(李相勳) 3단과 한종진(韓鍾振) 3단의 결승전. 흑을 든 한3단이 반면 15집이상의 우세를 지키지 못해 형세가 미세해졌지만 실수만 없다면 승리가 예상되는 바둑. 그러나 초읽기에 몰린 한 3단은 좌변 흑 2점을 살리기 위해 4도의 ‘가’ 자리에 둔다는 것을 그만 흑 1로 자기 집을 메꾸고 말았다. 바둑을 두던 이 3단은 물론 기록을 맡은 한국기원 연구생까지 어안이 벙벙해져 한 3단을 바라봤다. 이같은 터무니 없는 실수에도 흑이 반집정도 앞선다는 것이 대국후 밝혀졌지만 한 3단은 여기서 돌을 던졌다. 그의 머리에는 혼란과 부끄러움만 가득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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