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 담론]"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 입력 2000년 7월 10일 18시 44분


“상관하지 말라구?”

“내가 니꺼야? 난 누구한테도 갈 수 있어!”

“ … ”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어느 휴대전화 CF에 나오는 젊은 남녀의 대화다. 전화기나 인터넷만 움직이는 것(mobile phone, mobile internet)이 아니다. 상거래도 움직이고(mobile commerce) 투자시장도 움직인다(mobile funding). 모든 것을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공간에서 제어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사랑’이라고 상대의 시공간에 구속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이제 ‘기다림’은 미덕의 항목에서 제거됐다.

멀지 않은 옛날, 남녀의 사랑조차 두 사람이 소속된 집단 간의 만남이어야 했던 시대가 있었다. 두 사람의 만남에는 각자가 속한 집안과 학력과 직업이 중첩된 두 집단의 공존과 결합 가능성이 우선적 고려 대상이어야 했다. 생활 전반을 규정하고 있는 이 집단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그 사회에서의 통상적 생존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네트워크의 중심은 나

그러나 이제 개인인 ‘내’가 정보와 통신과 거래의 중심인 시대. ‘내’가 고려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나’다. 이렇게 전통적 인간관계의 결속력이 약해진 사회에서는 사랑도 쉽게 움직인다. 사랑의 신의를 저버림에 대한 책임과 비난마저 ‘나의 선’ 안에서 감당하기로 작정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제 D H 로렌스나 빌헬름 라이히, 조르주 바타유조차 사회적 메커니즘의 경직성을 부수기 위해 더 이상 ‘사랑’을 도구로 이용할 수는 없을 듯하다. 정신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사랑이란 거의 광기의 이면처럼 강렬하고 변덕스런 것이기에 사랑에 대한 대응력은 바로 그 사회의 안정성을 측정하는 시금석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이제 그 광기를 통제할 명분 자체가 소멸되고 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사람들조차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랑(moblie love)’을 이상적인 사랑으로 꿈꾸지는 않는다. 공동체 중심의 네트워크에 내가 소속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유동적인 네트워크(moblie net)를 만들어가는 ‘나’는 ‘나의 사랑’마저 ‘나의 네트워크’ 안에서 언제나 ‘나’와 접속돼 있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오늘 밤도 그대에게 “내 꿈 꿔”를 속삭이고 문자메시지는 ‘400번’쯤을 받아야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사랑은 언제나 ‘움직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강렬한 자극과 확인을 필요로 하며, ‘나만의 사랑’이 나의 네트워크 안에서 유일하고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오히려 더 간절하다.

◇더 간절한 '천년의 사랑'

만일 ‘움직이는 사랑’과 ‘영원한 나만의 사랑’의 공존이 모순으로 가득찬 허망한 꿈이라면 사랑이란 신화는 드디어 우리 시대에 이르러 ‘비극’으로 정의될 것이다. 사랑이 결핍에 대한 ‘충족’의 욕망이나 상대에 대한 ‘몰입’의 환상일 뿐이라면, 잠시 눈에 씌워졌던 ‘꺼풀’을 벗고 상대를 바라보는 순간 그 모순은 장렬한 폭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사랑은 상대의 모든 것에 대한 ‘인정(認定)’과 서로에 대한 배려를 통해 두 네트워크의 단순 배수 이상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결핍충족이나 몰입의 욕망으로 상대를 나의 네트워크 안에 종속시키려는 ‘인정투쟁’이 아니라, 존 로크가 말한 “각자의 영혼에 대한 배려”를 서로에게 확장하고 허용하는 ‘성숙’에서 비롯된다.

모든 인간, 모든 존재 하나하나가 움직이는 네트워크의 중심임을 인식하고 인정한다면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천년의 사랑’을 이번 생에서 만날 수 있다.

김형찬(동아일보 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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