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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6월 19일 19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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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재’라야 검사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렇지만 학창시절 성적이 뛰어나지 않으면 검사가 되기 힘든 게 우리 입시 제도와 사법시험 제도의 현실이다.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권력 지향적이고, 따라서 사법시험 경쟁이 워낙 치열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머리 좋은 사람이 많은 대표적 직업군(群)을 꼽으라면 검사가 빠질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검사들은 이런 저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핑계를 잘도 댄다. 법률가란 고대(古代) 그리스 시절부터 ‘궤변가’를 뜻하기도 했지만….
4·13총선 직전 옷로비 의혹 사건의 첫 공판 일정이 잡혀 있었다. 99년 한해 동안 정국을 시끄럽게 하고 화제도 많이 뿌렸던 사건이었기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첫 공판은 검찰의 요청에 따라 총선후로 연기됐다.
검찰이 담당 재판부에 내세운 이유는 이런 것이었다. “옷로비사건 주임검사가 선거사범 수사를 맡는 공안부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공판 준비를 미처 못했다. 특히 첫 공판이 있는 날에는 경찰과 선거관련 대책 회의를 열기로 예정돼 있다.”
경찰에 확인한 결과 “그런 회의는 예정된 바 없고 회의를 할 이유도 없다”는 것 아닌가. 검찰은 공판을 연기하기 위해 거짓말까지 동원했던 것이다. 검찰이 옷로비사건 공판을 연기시킨 진짜 이유는 뭘까. 유권자들에게 다시 그 사건을 떠올리게 하면 여당에 유리할 게 없다는 정치적 판단이었을 것이다.
검찰은 린다 김 로비 의혹 사건을 수사하라는 여론의 압력도 그럴듯한 핑계로 결국 물리쳤다. “수사에 나설 만한 단서가 없다.” 이 한마디로 버티면서 언론에 대해 ‘수사에 착수하지 않을 수 없는 단서를 어디 제공해 보라’는 식의 자세였다.
총선 직전 별다른 단서도 없이 정치인들의 병역 비리에 대한 수사에 착수, 주로 야당의 이미지를 손상시킨 그 검찰이 ‘단서 타령’을 늘어놓은 것이다.
동아건설의 정치자금 살포 사건. 지지난 주 초 서울지검 특수1부장의 첫 반응은 “그런 첩보를 입수해 내사를 벌여 왔다. 수사를 하겠다”는 적극적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음날부터 입을 막아야 했다. 정치인 수사에 소극적인 검찰 수뇌부의 질책을 받았다는 보도였다.
여기에서도 검찰은 공식적으로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웠다. “지금 수사를 하면 남북정상회담에 부담을 줄 수 있다. 회담이 끝난 뒤 본격 수사 여부를 결정하겠다.”
이제 그로부터 2주일 이상 지났다. 남북정상회담후 채택한 공동선언문은 몇 가지 논란을 부르기도 했으나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검찰이 본격 수사 착수를 연기한 이유로 남북정상회담을 내세운 것은 지금 생각해도 설득력이 약하다.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동안에는 온 나라가 모든 것을 중지하고 그 하나에만 매달려야 한단 말인가. 그것이 ‘큰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모든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남북정상회담이 ‘구차한 핑계’였는지 여부는 검찰이 앞으로 동아건설 사건을 얼마나 제대로 수사하느냐에 달렸다.
육정수<사회부장>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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