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이천표/날림개혁으로 금융 더 망칠라

  • 입력 2000년 5월 29일 19시 28분


우리는 2차 금융구조조정에 소홀했다가 다시 위기를 맞을 것이라는데 모두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 구조조정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당장 투신문제를 해결하는 것, 세계 50대 내외의 대형은행을 만드는 것을 논의하고, 간헐적으로 종금과 금고의 자본충실화나 부실 생보사의 매각정리를 언급한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금융구조조정의 구체적 내용과 스케줄에 대한 청사진은 없다.

정책당국은 지난 10여년간 여러 가지로 투신사의 운영에 간여해 왔다. 투신을 증권시장 떠받치기용으로 활용한 것은 부적절한 간여의 극치였다. 대우채에 대해 80∼95% 상환보장을 한 것도 다르지 않다. 그 이면에서 저축자들의 자산운영 대리인인 투신은 주어진 바 선량한 관리자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

여기에 투신 자체의 영업실패가 겹쳐 오늘의 부실투신이 만들어졌다. 은행 비슷하게 인식돼 오기도 한 투신이기에 이 시점에서 대거 자금인출사태가 벌어진다면 큰 일이다. 사실상 은행인 투신에서 ‘뱅크 런’이 있게 되면 금융시스템 전체가 붕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공적자금 투입이 기도되나 아직은 그 재원조달 방안이 불안하고 막연하다.

은행합병을 유도해 대형은행을 만드는 것은 분명 세간의 주목을 끄는 사건이겠으나 금융시스템 붕괴예방과 직접 관련된 긴급사안은 아니다. 또 합병으로 만들어진 세계 50대 내외의 큰 은행의 영업력이 어떨는지도 의문이다. 합병을 하게 되면 전산투자의 중복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노조와의 관계를 비롯한 조직재편과 인력활용 면에서의 불협화음은 각오해야 한다. 일본식 시간 때우기요, 겉핥기라고 비판받는 지주회사 방식의 합병도 그 구체적 실익을 냉정히 계산해 봐야 한다.

단순한 그림에서 미래의 금융기관은 슈퍼뱅크와 금융전문점으로 양분된다. 전자는 지구상 모든 금융센터에서 모든 금융상품을 가지고 영업하는 대형은행으로 규모의 경제와 범위의 경제를 그 이익기반으로 한다. 전세계에서 슈퍼뱅크는 많아야 7, 8개 되리라 한다. 나머지는 모두 금융전문점일 수밖에 없다. 한정된 지역에서 한정된 상품을 가지고 영업하며 틈새시장을 노려야 하는 것이다. 이런 단순 그림을 가지고 볼 때 우리의 합병 후 은행은 결코 슈퍼뱅크가 될 수 없다. 우리 안에서 아무리 크고 요란하더라도 그것은 우리경제 내에서 영업하는데 비교우위를 가지는 전문점일 수밖에 없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앨런 그린스펀의장은 금융위기를 겪은 나라의 공통점으로 취약한 직접금융시장을 적시했다. 그는 간접금융기능이 약화됐을 때 직접금융시장이 이를 보충해 금융 본래의 기능을 지속할 수 있게 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도 지난 2년간 직접금융을 확충시키고자 노력했다.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 비율과 부채비율을 강조하며 간접금융을 억제했고 그 대신 주식시장이나 채권시장을 이용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그 성과는 아직 제한적이다. 채권발행이 어려워져 유동성 문제가 다시 논의되는 현실이다. 사실 잘 작동하는 직접금융은 정비된 인프라를 전제로 한다. 효율적 투자은행, 경험 있는 변호사와 회계사, 확립된 워크아웃제도 및 관련 전문가 등이 전제돼야 한다.

이런 모든 것을 갖추는 데에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된다. 이 때문에 단기적으로 우리는 제한된 정도로 커 가는 직접금융과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간접금융을 지니고 살 수밖에 없다. 금융구조조정의 구도와 속도에 대한 청사진은 이런 인식에서 나와야 한다.

투신에 투입할 재원 마련이나 은행합병 계획도 이런 청사진 속에서 그 타당성과 추진속도가 결정돼야 한다. 우선순위에서 뒤지는 제도변경을 하면서 마치 낡은 관행의 근본개혁인 양 오도하거나 구조조정의 근본구도와 유리된 미봉책을 가지고 구조조정의 초점을 흐리게 해서는 안된다. 은행의 조직이나 수장을 바꾼 다음 일할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하면서 문제해결을 사실상 연기하는 이벤트성 조치도 극력 경계해야 한다.

이천표 <서울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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