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경제 핵심들 말바꾸기, 시장혼란 부채질

  • 입력 2000년 5월 11일 18시 31분


은행 구조조정과 공적자금 투입 등 주요 금융현안에 대해 정부 고위책임자들이 수시로 말을 바꾸고 사람에 따라 발언 내용도 달라 가뜩이나 시장기반이 취약한 금융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2단계 금융구조조정을 추진할 핵심 제도인 금융지주회사 관련법의 도입시기가 늦춰지면서 각 금융기관은 준비작업을 중단한 채 정부 눈치만 보고 있는 실정. 예금보험공사 사장의 공석 상태가 한달 가까이 지속되는 바람에 공적자금 회수에도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유행처럼 번진 ‘말바꾸기’〓금융정책의 3대 축을 이루는 이헌재(李憲宰)재정경제부장관 이용근(李容根)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 이기호(李起浩)대통령경제수석은 편의에 따라 정책기조를 바꾸는 듯한 언급으로 시장의 불신을 심화시켰다. 총선 전만 해도 연내 은행통폐합이 없을 것처럼 말했다가 최근 ‘합병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발언 기조를 바꾼 것이 대표적인 예. 공적자금 추가조성 여부에 대해서도 “64조원으로 충분하다”는 총선전 입장에서 “40조원은 더 있어야 한다”는 쪽으로 슬그머니 돌아섰다.

경제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세 사람이 중구난방식 해법을 쏟아내는 것도 문제. 공적자금 조성방식에 대해 이장관은 “돈이 필요하면 국민의 이해를 구할 것”이라며 국회동의를 통한 조성을 시사한 반면 이수석은 “추가 조성을 않기로 한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국회동의없이 무보증채 발행으로 충당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재경부 관계자는 “시장에 미칠 충격을 감안해 우회적인 어법을 사용하다보니 말이 바뀐 것처럼 비칠 뿐”이라고 해명하지만 시장에서는 ‘경제분야에 관한 한 정부가 세 곳인 것 같아 헷갈린다’는 반응.

▽유행처럼 번지는 아전인수 해석〓애매모호한 발언이 되풀이되자 금융계는 각자 편한 대로 받아들이는데 익숙해졌다. 정부 관계자가 특정 주제에 대한 언급을 통해 시장에 향후 정책방향에 대해 ‘신호’를 주는 기능이 마비된 것이다.

6∼8일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개발은행(ADB) 총회 기간 중 이장관은 은행장들과의 간담회에서 “은행들도 전산이나 인력개발 같은 관리업무 분야에서는 전략적 제휴나 아웃소싱을 시도해 규모의 경제를 이루고 중복투자의 소지를 줄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 발언에 대한 은행장들의 반응은 천차만별. 합병에 적극적인 김정태(金正泰)주택은행장은 합병을 촉구하는 뜻으로 받아들인 반면 A행장은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전략적 제휴에 좀더 신경을 쓰라는 권유”라고 의미를 축소했고 B행장은 “진짜 속뜻이 무언지 알 듯 모를 듯 하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금융구조조정에 대해 명확한 방향과 일정을 제시하지 않은 채 뜸만 들이다보니 은행들이 촉각만 곤두세우다 진이 빠진 형국”이라고 지적했다.

▽정책지연에 인사는 난맥〓금융기관의 겸업화와 대형화를 추진하기 위해 추진중인 금융지주회사법은 당초 올 6월 안에 완성될 예정이었지만 관계부처 이견으로 8월로 늦춰졌다.

금융지주회사 도입에 대비해 증권 보험 등 다양한 형태의 자회사 구성을 검토해온 은행들은 일손을 놓은 채 법안에 담길 내용을 탐색하는 데만 치중하는 실정.

여기에 금융현장에서 직원들을 독려해 공적자금을 한푼이라도 더 회수해야 할 예금보험공사 사장은 한달 가까이 공석으로 방치되고 있다. 후임자 인선에 대한 청와대와 재경부의 의견대립 탓이라는 얘기가 번지면서 경제팀의 팀워크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 관계자는 “금융기관의 불법행위에 대한 처벌 못지 않게 앞으로는 감독당국의 감독소홀이나 정책실패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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