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래정/연기금이 '證市 구명줄'인가

  • 입력 2000년 4월 18일 19시 28분


증시안정책을 내놓으라는 투자자들의 성화가 빗발친 17일 오후 금융감독위원회 고위관계자들은 “연기금을 동원할 수는 없다”고 못박았다. 증시가 외국에 개방됐고 일종의 대체시장인 선물거래까지 활성화된 마당에 수급에 개입하는 것은 ‘약발’도 먹히지 않고 혹독한 후유증만 남긴다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그러나 불과 10시간여 뒤 재정경제부가 금감위와 협의해 내놓은 증시안정책에는 ‘연기금 활용’이 버젓이 포함됐다. 금감위 관계자들은 “어떻게 끼여 들어갔는지 알 수 없다”고 황당해했다. 재경부는 “시장이 무너질 경우에 한해, 장기적으로 활용한다는 의미”라고 장황하게 해명했지만 시장에는 ‘가용 연기금 규모가 몇조원’이라는 장밋빛 기대만 전달됐다.

연기금 관련 부처들의 반응 역시 차가웠다. 기획예산처 고위관계자는 “과거 몇차례 연기금 동원이 모두 실패로 끝났다”며 “자금 운용자들이 정부 말을 들을지 의문”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40개에 육박하는 연기금중 ‘증시용’은 국민 공무원 사립학교교직원 군인연금 등 4가지. 올해 17조7000억원의 자금을 운용할 국민연금은 6200억원어치의 주식을 살 수 있지만 여력은 3700억원에 불과하다. 공무원연금은 대규모 명퇴를 앞두고 재원이 없어 재경부로부터 1조원을 꿨다. 대부분 연기금은 한도를 넘어 주식을 살 경우 엄격한 심사를 거치기 때문에 ‘거래타이밍’도 우려스럽다는 지적.

과거 정부 강요로 주가부양의 십자가를 졌던 투신사들은 아직도 그때 떠안았던 부실을 해소하지 못해 자본시장 선진화에 짐이 되고 있지만 당시 정책 입안자들 중에 지금까지 어느 누구하나 책임진 사람이 없다.

연기금은 국민의 노후생활을 보장하는 장기저축. 그 부실은 고스란히 후대로 넘어가기 때문에 가공할 후유증을 남길 수 있다. 정책 담당자들의 말과 행동을 나중에 평가할 수 있는 ‘정책실명제’가 아쉽다.

박래정<경제부> eco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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