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산불]嶺東 산불과의 전쟁…軍-예비군 동원

  • 입력 2000년 4월 12일 23시 17분


폭 200m가 넘는 하천도 불길을 막지 못했다. 하늘은 온통 연기로 뒤덮였고 땅은 검게 그을렸다. 주민들은 넋이 빠져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소방 헬기와 소방차 사이렌 소리, 군과 경찰 예비군 병력의 부산한 움직임 등으로 강원 영동지역과 경북 울진의 산불 현장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울진▼

○…경북도와 울진군 관계자들은 12일 낮 12시 45분경 강원 삼척의 산불이 강풍을 타고 삼척시 원덕읍 호산리와 월천리 사이의 가곡천을 넘어 월천리로 옮아붙은 뒤 오후 1시25분경 월천리에서 2㎞ 가량 떨어진 도 경계마저 돌파하자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들은 당초 가곡천의 폭이 200∼400m나 되는 데다 주변 지역에 물을 뿌려 미리 방화선을 구축한 상태여서 삼척의 산불이 하천을 넘지 못할 것으로 장담했었다.

가곡천 일대에서 경계근무를 하던 울진군 산림과 관계자는 “갑작스러운 돌풍으로 헬기 진화작업이 잠시 중단되는 사이 가곡천 건너편 산에서 불길이 치솟았다”며 “불똥이 바람을 타고 날아온 것 같다”고 말했다.

○…울진군 북면 나곡6리 고포마을 이기옥할머니(79)는 산불을 피해 동네 노인들과 함께 백사장에 나와 시시각각 마을로 내려오는 불을 지켜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울진군과 삼척시 원덕읍 월천2리의 경계지역인 이 마을은 30여가구 104명이 살고 있는 외딴 곳. 이날 오후 1시반경 강풍을 타고 불길이 순식간에 마을을 덮칠 듯 맹렬한 기세로 번졌다.

주민들은 긴급 대피령에 따라 간단한 이부자리와 가재도구, 쌀과 반찬 등을 대충 꾸려 백사장으로 피신했다. 이 마을 산불은 오후 6시경 수그러들었으나 주민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바닷가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삼척▼

○…12일 삼척시 원덕읍 일대는 온통 연기로 뒤덮여 하늘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원덕읍에서 내륙으로 3㎞ 가량 떨어진 산불 현장은 여기저기 숯덩이가 나뒹굴었다. 산불이 휩쓸고 간 곳은 흑갈색이던 토양이 적갈색으로 변했다.

주민 김진녀씨(65)는 “모두 불에 타 당장 밥 해먹을 그릇도 하나 없다”며 눈물을 흘렸다.

○…산불 진화를 위해 대규모 군 병력이 투입되고 예비군 동원령이 내려지는 등 강원 동해안 지역은 ‘전시상태’와 마찬가지.

동해안 경계를 총괄하고 있는 육군동해충용부대는 12일 오전 7시 1500여명의 병력을 삼척 산불지역에 긴급 투입하는 등 이날 하루 5000여명의 병력과 헬기 14대를 강릉과 고성 등 3곳의 산불 현장에 투입했다.

또 12일 오전 2시를 기해 삼척지역에, 오전 7시를 기해 강릉지역에 각각 예비군 동원령이 내려져 이 지역 예비군 8000여명이 긴급 투입됐다.

▼동해▼

○…12일 동해시는 삼척에서 발생한 산불이 강한 바람을 타고 옮아붙어 시 전체가 연기와 재, 매캐한 냄새로 뒤덮였다. 온종일 헬기가 날아다니고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도 그치지 않았다.

불은 이날 오후 4시경 북삼동 효가동 일대 주택가 뒤편 야산까지 번졌고 수백 여명의 주민들은 집 주위에 물을 뿌리고 가재도구를 집 밖으로 내놓는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이날 북삼동 주택가에서 소방대원들을 도와 화재진압 작업을 한 동해기관차 승무사무소 직원 엄진범(嚴鎭凡·41)씨는 “불씨가 강풍을 타고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고 있다”며 “비가 내리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동해시는 이날 오전 초속 20m의 돌풍을 타고 남하하던 불길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 북상, 해군 화약창고까지 다가가자 마을마다 사이렌을 울리며 주민들에게 바닷가로 대피하도록 가두 방송을 했다.

▼강릉▼

○…12일 새벽 강릉시 홍제동에서 발생한 산불은 거센 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동해고속도로를 넘어 시내로 번져 홍제동과 교동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주민 김순예씨(78)는 “가스통 터지는 소리가 들려 가재도구를 챙길 생각은 엄두도 못내고 몸만 간신히 빠져나왔다”고 말했다.

최낙중씨(62)도 “소방차 소리에 잠을 깨 보니 앞산에서 거대한 불길이 치솟은 뒤 순식간에 집으로 옮아붙어 급히 가족을 깨워 도망치듯 피했다”며 긴박했던 상황을 전했다.

<강릉·삼척·동해·울진〓최창순·경인수·남경현·이명건기자>sunghy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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