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인범/2000년 동아미술제에 거는 기대

  • 입력 2000년 4월 11일 19시 51분


‘왜 ‘한국적 특성의 발현’인가?

올해 동아미술제가 내거는 화두는 ‘한국적 특성의 발현’이다. 우선 이러한 주제 설정은 지난 20년 동안의 ‘새로운 형상성’을 내용적으로 크게 변경하는 것이어서 주목을 끈다. 물론 그 의미가 간단히 이야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비구상만이 전횡하던 시절 ‘새로운 형상성’의 잠재력을 일깨우고자 했던 동아미술제의 새로운 면모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제 우리 미술계 모습도 풍성해졌다. 하나의 강력한 중심의 지배는 옛이야기가 되었다. 비구상의 독점적 힘과 함께 이미 ‘형상성’을 힘주어 강조할 이유도 사라졌다. 버려졌던 몸과 감성이 발언권을 되찾는가 하면 여성 환경 생태 같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이슈들이 떠올랐다. 분명 변화된 시대의 풍경이다.

이런 시대에 ‘한국적 특성의 발현’의 주제설정은 다소 이례적이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에게 강력한 문제제기로 다가서는 것은 왜일까. 그 발언은 빗나간 세계화 신드롬이나 하이테크 중독증이 안겨주는 현기증과의 대비 속에 더 분명해진다. 어떻든 탈근대주의라는 이름 아래 삶의 연속성을 아랑곳하지 않음은 물론 역사로부터의 탈주 자체를 근거 없이 마구 미화시키는 최근 세태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근대기의 쓰라린 서세동점, 피식민지 역사 체험, 혹은 상실된 역사가 디지털문명이나 서구에의 맹목적인 몰입 속에 묻어버리고 말 그 무엇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지켜내고 발현해낼까 하는 개화와 더불어 부과된 과제를 하루아침에 폐기시켜 서구의 탈정체성의 신화(?) 속에 무산시킨다고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 이번 동아미술제는 그동안의 동도서기론, 향토적 소재주의, 아시아주의, 민족문화론, 한국성, 자생성 등 숱하게 버전을 바꾸며 시도되어온 한국미의 정체성을 규정해내기 위한 시도를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듯 한국적 특성은 우리가 숙명적으로 열어가야 할 하나의 가능성이다. 하지만 그리 만만치 않다. 그런 열정은 또한 맹목적인 것이 되기도 쉽기 때문이다. 서구의 지배담론을 벗어던진다고 해서 국수주의적인 자기도취까지 정당해지는 것도 아니다. 과거로 돌아가 ‘한국적 특성’을 규정지으려 할 때는 자칫 삶을 고착화시키기 십상이다. 그래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것은 회의하며 따가운 질문을 던지고 그 어둠까지 바로 보고자 했을 때 드러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제야 비로소 ‘한국적 특성의 발현’은 근대적 불행의 극복이자 진정한 세계시민에의 길로 이어질 것이다.

콤플렉스의 대상이 아니듯이 그 자체만으로 전통은 미덕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현재화하려는 자에게만 아슬아슬하게 참조처로 다가선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과거와 이 현실, 남과 나 사이를 넘나드는 비판적인 해석학적 담론이 요구된다. 그 모든 것이 작가들의 몫이다.

이인범(한국예술종합학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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