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황주리/우리 젊은 날 꿈은 어디 갔나?

  • 입력 2000년 3월 29일 19시 46분


영화 ‘박하사탕’을 보았다. 모든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몹시 운이 나쁜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지만, 주인공과 동시대를 살았던 우리 세대는 작게든 크게든 같은 상처를 어루만지는 기분이 든다. 기차가 지나가는 철도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그 어두운 얼굴은 이제 마흔 중반쯤에 들어서는 우리 세대의 자화상은 아니었을까.

어느 세대의 꿈인들 슬프지 않으랴.

군대 간 애인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박하사탕을 넣어 보내던 아가씨는 이십여 년이 지난 훗날 식물 인간이 되어 누워 있고, 그녀를 찾아가서 펑펑 울어대는 주인공의 눈물은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슬픔이라기보다는 빗나간 자신의 삶에 관한 설움의 복받침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7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녔고 80년 그 시절 비극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어버리는 지독히 운 나쁜 한 사내이면서, 그 삶의 단서를 풀어주는 박하사탕이고, 동시에 묵묵히 그 세월의 슬픔과 부조리를 지켜보아온 철도이다.

▼삶의 쓴맛 배어나는 '박하사탕'▼

영화 ‘25시’에서 ‘앤서니 퀸’의 마지막 표정처럼, 한 개인의 빗나간 행로는 역사를 대변하는 철도 앞에서 한갓 희미한 기적 소리의 추억으로 남는다.

그 추억 속 입안 가득 알싸하게 퍼져 나가던 잊을 수 없는 향기, 영화 속 박하사탕의 이미지는 젊은 날 우리가 간직했던 향긋한 희망이고 물질화된 꿈이다.

내게 그 박하사탕 같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데모 행렬에 한번도 낀 적조차 없지만 4년 내내 최루탄 연기 속에서 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그저 불행했던 그 시절의 나는 누구였을까.

영화 속의 주인공이 자포자기 상태에서 엉뚱하게 빗나간 삶의 단추를 잘못 끼우기 시작할 무렵, 나는 유학을 가기 위해 종로 학원가를 서성거렸다.

‘TOEFL’이라는 단어가 온 머리를 가득 메웠던 그 시절, 나는 왜 그토록 간절히 유학을 꿈꾸었을까.

영화 ‘박하사탕’은 우리들 삶을 거꾸로 돌려본, 몹시 우울한 날에 꾸는 꿈 이야기일지 모른다.

그러나 유학을 가서 지냈던 나 개인의 십여년의 세월 또한 그리 길지 않은 꿈이었음을 안다. 내게 박하사탕은 서울을 떠나기 전 서랍 속에 두고 간 구운 오징어다리였을까.

그때만큼은 진짜였던 사랑의 흔적들, 내가 떠난지 오래지 않아 돌아가신 아버지, 미치도록 떠나고 싶던 날들의 그 소중했던 토플 수험표, 승자와 패자가, 피해자와 가해자가 계속 바뀌는 무정한 세월….

운동권은 운동권대로, 강남의 유흥가를 휘젓고 다니던 오렌지족은 또 그들 나름대로, 나처럼 간절히 숨막히는 이 나라를 떠나고 싶었던 우울한 청춘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대책없이 휘청대는 세월의 농간에 지쳐 모두 고통스럽던 시절이었다.

서울을 떠나 미국에서 내가 찾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는 꼭 만나게 될 빛나는 성공과 박수소리를 꿈꾸며 배고프지 않았던 젊은 날, 박하사탕의 이미지는 지금은 잃어버린 때묻지 않았던 우리들의 첫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운이 없어 실패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운이 좋아 승승장구 출세한 사람들도 자신들의 박하사탕을 어느 길목 쓰레기통엔가 버려버린 것은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급변하는 세상 나의 위치는▼

점점 더 굳어지는 영혼의 갑각류가 되어 생각 같은 것은 선반 위에 얹어둔지 오래이고 눈 딱 감고 더듬이로 더듬으며 살아가는 40대, 드디어 우리는 젊은 날 그리고 혐오하며 실망해 마지않던 그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쯤 우리는 무디어지고 뻔뻔해지고 탐욕스러워졌거나, 작아지고 비겁해지고 의기소침해진 것은 아닐까.

그 어느 쪽인들 슬프지 않으랴.

세상은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는데, 그 속도와 무관한 떳떳한 ‘나’를 찾는 일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문득 내 청춘의 오래된 청바지 뒷주머니에 아직도 들어있는 박하사탕을 입안 가득 깨물어본다.

손에 꼭 쥐면 끈끈하게 묻어나는, 이제는 향기가 사라져 오래된 나프탈렌을 닮은 박하사탕, 그러나 내버리기에는 아직은 너무 이른 새천년의 봄이다.

황주리(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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