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4개월째 진전없는 5조원대 고엽제소송

  • 입력 2000년 2월 27일 19시 44분


‘소송가액 5조2000여억원, 공동원고 1만7200여명, 손해배상 임시지급 가처분신청액 3862억원, 예상 판결기간 최소 5년….’

다우케미컬과 몬샌토 등 미국계 고엽제 제조회사를 상대로 한 고엽제 소송이 지난해 12월 단 한 차례의 심리만 열린 채 진전없이 멈춰서 있다. 지난해 6월 고엽제 피해자 나모씨 등 1만7200여명이 소송을 낸 시점을 전후로 특허권 330종 가압류 결정, 1800억원대 소송구조 결정 등 숨가쁘게 진행되던 것과는 판이한 상황 전개다. 3862억원의 임시배상 명령 결정을 앞두고 있는 또 다른 재판부도 심리를 마친 뒤 4개월째 장고(長考)중에 있다.

재판부인 서울지법 민사합의13부(재판장 유원규·柳元奎 부장판사)는 현재 3000여쪽에 이르는 국내외 자료와 씨름하고 있다.

이 소송의 최대 핵심은 고엽제가 고엽제 피해자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제조회사는 이를 알고 있었는지 여부다. 그러나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기한인 소멸시효가 지났는지, 한국 법원이 재판권을 갖고 있는지 등도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다.

▽소멸시효〓고엽제 피해자들은 민법상 ‘객관적, 구체적으로 손해가 발생해 권리행사가 가능한 때’를 소멸시효가 시작되는 날로 보고 있다. 즉, ‘고엽제 후유증 치료법’이 발효된 93년 이후 검진결과 고엽제 환자로 인정돼 통보받은 날이 기준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고엽제 피해가 2, 3세에게 유전되는 것이 인정되는 만큼 고엽제 피해는 ‘진행형’이라는 논리다.

▼소멸시효 놓고 양측이견▼

다우케미컬측은 “대법원 판례에 따라 베트남전쟁 종료 시점인 70년대가 소멸시효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또 80년대 고엽제 소송이 진행됐던 미국 미주리법을 참고한다면 “고엽제 피해자가 고엽제 질병이 발생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시점이 기준”이라며 “고엽제법상의 환자등록일인 90년대 중반 이후가 될 수 없다”고 받아쳤다. 다우케미컬측은 “고엽제 피해자 스스로가 ‘91년 언론보도를 통해 고엽제 환자임을 알게 됐다’고 자인한 만큼 소멸시효가 지났다”며 언론보도물을 증거물로 제출했다.

▽재판관할권〓피해자를 대리하고 있는 백영엽(白永燁)변호사는 당연히 한국법원도 고엽제 소송을 심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베트남전 참전자들이 귀국한 뒤 한국에서 손해가 발생했고 다우케미컬 등 제조회사가 한국에 회사를 설립해 330여종의 특허권까지 등록하고 영업하고 있으므로 ‘원고 피고 모두 국내활동’으로 볼 수 있다는 논리다.

제조회사측은 한국 법원에서 재판받을 이유가 없다고 맞서고 있다. 다우케미컬이 국내에서 사업은 하고 있지만 국내에 영업소나 대표자가 없는 외국법인일 뿐이며 지난해 가압류된 특허권은 고엽제와는 전혀 무관한 자산이라는 것이다.

▼과실책임 피할 수 없어▼

▽제조회사의 책임여부〓고엽제 피해자들은 제조회사들이 고엽제의 다이옥신 성분이 갖는 독성을 모를 리 없었다고 주장한다. 백변호사가 재판부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고엽제가 ‘염소성 여드름’ 등의 피부질환을 일으킨다는 것을 49년부터 알고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6·25전쟁중인 52년 이미 다이옥신의 독성에 대한 보고서가 나왔다는 기록도 있다.

▽섣부른 낙관론〓국내 고엽제 피해자에게는 현재 고엽제 소송에 대해 막연한 낙관론이 퍼져 있다. 지난해 법원이 소송 인지대 1500억원에 대한 납부를 미뤄주고 다우케미컬 등이 지닌 국내특허 330건에 대한 가압류 처분을 받아들인 데 고무된 것이다.

법조계에선 이 같은 낙관론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소송구조결정은 “어느 정도 승산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100% 패소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조물책임법(PL)이 폭넓게 적용되는 미국에서도 법원이 미국 호주 뉴질랜드의 베트남전 참전자가 낸 소송을 소송 시작 6년만인 84년 ‘강제 조정’했을 뿐이지 승소판결을 내리지는 않았다는 점도 새겨봐야 한다는 주장도 강하다. 당시 일부 전역 군인들은 법원의 조정에 따른 제조회사의 1억8000만달러(약 2000억원)의 기금 혜택을 거부하고 소송을 계속했지만 모두 패소했다.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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