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민병욱]'아니면 말고…'

  • 입력 2000년 2월 17일 19시 40분


오랫동안 품었던 의문이 최근에 다 풀렸다. 정부여당이 실책 무리수를 연발해 지지도가 계속 떨어지는데도 한나라당은 어째서 여당의 그것을 능가하지 못할까 하는 의문이었다. 해답은 한나라당 스스로 쥐고 있었다. 여론의 지지를 일부러 거부하듯 신뢰할 수 없고 책잡힐만한 일을 골라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폭로전문가라는 이신범 정형근의원의 행태와 이들을 두둔하는 이회창총재에게서 그런 것이 두드러진다.

▼ 무조건 폭로-체포영장 불복 한심 ▼

이의원의 경우를 보자. 그는 지난주 “김대중대통령의 3남 홍걸씨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대지 1만여평의 600만달러짜리 호화주택에 산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대통령의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폭로였다. 당연히 언론사마다 현지로 기자들을 급파해 사실여부를 취재했으나 내용은 딴판이었다. 홍걸씨 집은 호화주택지역에 있지도 않았고 집값도 동네에선 싼 편이었다. 그곳 주민들은 한국 대통령의 아들집이 호화주택인지 아닌지 확인하러 불원천리 찾아온 기자들을 보고 ‘웃긴다’는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괜찮은 편이다. 누구든 비리의혹이 있으면 철저히 확인해보고 폭로해야 옳지만 대통령 일가의 것이니 다급한 마음에서 우선 터뜨렸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폭로내용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고 이의원이 돌연 미국으로 떠나자 순진한 사람들은 그가 잘못을 사과하려고 출국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웬걸, 미국에 간 이의원은 한술 더 떴다. “호화주택이 홍걸씨 집이라고 언급한바 없다”며 한발은 뺐지만 “유학생인 홍걸씨가 호화생활(월 5000달러)을 하는데 그 돈의 출처가 의문”이라고 새판을 벌였다. 1차 의혹을 제기한 것은 ‘아니면 말고’, 2차 또 의혹이 있으니 조사해보자고? 엉뚱한 폭로를 한 잘못은 ‘나 몰라라’고 그래도 상대는 먼지날 때까지 계속 털겠다는 심보다.

정형근의원의 경우는 더욱 한심하다. 법원이 발부한 체포영장에 불복했던 것은 그렇다 치자. 한국의 현상황은 ‘좌익광란의 시대’고 대통령이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몰아치는 것도 워낙 쫓겨 악에 받쳐 한 말일테니 ‘아니면 말고’ 식으로 봐주기로 하자. 방탄국회가 열려 체포될 염려가 없어졌으므로 어제 검찰에 출두한 것도 그런대로 이해해주자. 납득하기 어려운 점은 출두해서는 묵비권을 행사하고 이와는 별도로 부산에서는 장외집회를 검토한다는 데 있다. 자신이 고소한 사건에도 묵비권을 행사한다니 웃기고 검찰의 정치적 의도를 꼬집은 사람이 자신은 한바탕 정치적 판을 벌이겠다니 그 심리상태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게다가 왜 또 부산인가. 현정권 들어 야당은 걸핏하면 부산에서 집회를 열어 지역감정을 자극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순수하고 직선적이며 정치의식도 높은 부산시민들의 비판정신을 우군 삼아 법집행에 대항하자는 의도라면 이는 부산시민을 거꾸로 욕보이는 일이다. 사법적 판단에 맡길 문제를 지역정서를 바탕으로 한 여론의 흐름에 실어보자는 얄팍한 꾀는 오히려 지역민의 반발을 살 수 있다. 심지어 당내에서조차 꼬리를 내리고 쪼르르 주인의 치마폭 뒤로 숨는 모양새라는 비판을 하고 있지 않은가.

▼ 야당의 생명은 공정-선명성 ▼

야당은 순수 공정 선명성을 지향해야 한다. 거짓 불의에 휘둘리지 않는 순수함, 권력의 자의적 행사에 맞서는 공정성, 돈 권력의 압력에 야합하지 않는 선명성이 있어야 한다. 원칙주의자이며 대쪽 법대로의 이미지를 자랑하는 한나라당의 이회창총재는 그런 순수 공정 선명성에 잘 부합할 수 있는 인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근의 엉터리 폭로나 법집행에 반발하는 한나라당의 여러 행태에서 우리는 원칙과 법대로가 함몰되는 현상을 본다. 거짓 폭로를 하고도 사과 한마디 없고 당 사무총장의 공언도 다음날 헌신짝처럼 차고마는 등 ‘원칙’과 ‘편의’ 사이, ‘법대로’와 ‘멋대로’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인다.

나만 옳다고 악쓰는 자세로는 절대 믿음을 얻지 못한다. 잘못은 바로 사과해야 또 다른 주장과 비판도 가능해진다. 매번 ‘아니면 말고’식 사고로 일을 벌이면 상대측에서도 ‘아니면 말고’로 대응할 것이다. 그러고도 한나라당 지지도가 올라간다고 생각한다면 ‘정신 나간 일’이다. mincho@donga.com

<민병욱기자> min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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