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지하철 1호선'의 힘

  • 입력 2000년 2월 7일 19시 57분


서울 대학로의 학전소극장에서는 엊그제 매우 값지고 의미 있는 기록이 세워졌다. 이 소극장에서 장기 공연 중인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 1000회째 공연을 한 것이다. 작곡가이자 연출가인 김민기씨가 이 작품을 제작해 첫 공연을 가진 것이 94년 5월의 일이니까 6년 만에 일궈낸 수확이다. 같은 연극을, 그것도 같은 장소에서 이처럼 오래 계속하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연극도 일반 상품과 마찬가지여서 배우들이 제아무리 공연을 계속하고 싶어도 관객이 찾아오지 않으면 막을 내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연극계에는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 이후 최악의 불황이 들이닥쳤다. 온갖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작품의 생명력을 키워온 제작 및 출연진에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어둠이 짙으면 불빛이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고 했던가. ‘지하철 1호선’의 롱런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은 연극 문학 등 순수문화가 놓여 있는 척박한 환경 때문이다. 최근 순수문화의 침체와 불황은 경제한파 이전부터 감지되어 왔다. 경제가 어느 정도 회복됐으나 이들 분야는 나아질 조짐이 별로 없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 적지 않은 우려를 자아낸다. 순수문화의 불황이 경기침체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다수의 관심권에서 순수문화가 소외된 데 따른 구조적인 문제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 1호선’의 성공은 이처럼 열악한 여건에서도 순수문화가 살아남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모델로서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이 작품은 독일의 원작을 채택하고 있으면서도 철저하게 우리 식으로 번안된 뮤지컬이다. 또 무대에 올릴 때마다 매번 내용을 보완해 가면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더욱 보기 좋은 것은 제작진의 예술을 향한 열정과 집념이다. 작품 곳곳이 패기와 의욕으로 넘쳐흐른다. 이런 것들이 일차적인 ‘성공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무척 외롭고 힘겨워 보인다. 현재의 문화토양에서 ‘배고픈 순수예술’이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 때문이다. 순수문화는 가난에 쪼들리지만 조금만 문화산업쪽으로 눈을 돌리면 이와 대조적으로 여유가 넘친다. 정부도 문화산업을 키워야 한다며 이쪽에만 집중적인 투자와 지원을 하고 있다. 산업에 비유한다면 순수문화는 제조업이고 문화산업은 벤처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제조업의 기반이 없는 벤처가 존재할 수 없듯이 순수문화 없는 문화산업은 발전할 수 없다. ‘지하철 1호선’의 뜻깊은 기록 수립을 기뻐하면서 한편으로 우리 문화를 형성하는 밑바탕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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