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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1월 19일 20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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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유력지 뉴욕 타임스는 최근 엘라의 부음과 일대기에 관한 기사로 한 면의 3분의 1 정도를 할애했다. 사랑과 인간미가 넘치는 월프 부부와 냉혈한 스탈린이 대조되는 내용이다. 1929년 미국 공산당 간부로 모스크바에 간 월프는 스탈린의 독재노선을 비판하다가 억류당한다. 6개월 후 월프는 코민테른의 사무당원이던 엘라를 볼모로 남겨둔 채 혼자서 귀국해야 했다. 엘라는 2년 후에야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이런 쓰라린 경험 끝에 월프 부부는 맹렬한 스탈린 비판자가 됐다.
▷엘라의 사망 소식에 이어 모스크바에서는 스탈린 치하에서 1930년대에 학살당한 고려인 1000여명의 명단이 발견됐다. 스탈린의 잔혹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1860년대를 전후해 러시아령 연해주에 이주한 고려인들은 ‘개척리’라는 마을을 형성했다. 이것이 후에 항일운동의 근거지인 신한촌(新韓村)으로 개명된다. 1920년대 연해주 일대의 고려인은 20만∼30만명에 이르는 일종의 자치민족으로 발전했다. 이런 기반으로 전노(全露)한족대표자회의가 조직됐다.
▷스탈린은 이른바 혁명동지들까지 냉혹하게 숙청했지만 가족관계도 비인간적이었다. 첫 부인 소생의 아들이 2차대전 중 독일군에게 포로로 붙잡혔을 때 그는 독일측의 협상제의를 거절하며 아들을 경멸했다. 후처는 스트레스에 못 이겨 자살했으며 그 아들은 심한 알코올중독으로 죽어야 했다. 고려인들이 대량 학살당한 1930년대는 스탈린의 광기가 극에 달한 때였다. 솔제니친에 따르면 그로부터 스탈린이 죽은 1953년까지 구소련에서 4000여만명이 강제수용됐다. 저항정신이 강한 고려인들은 이 과정에서 비밀경찰의 공격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비운의 진상이 낱낱이 밝혀져야 한다.
<김재홍 논설위원> nieman9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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