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순덕/남성의 '밀레니엄 버그'

  • 입력 2000년 1월 10일 19시 48분


지난해 서울대 음미대 입시에서 남녀 학생 구분 모집을 없애겠다고 발표했을 때 가장 거센 반발을 보였던 이들은 고3아들을 둔 어머니들이었다.

예능계 대학 남녀구분이 남녀차별금지법에 저촉된다고 결정한 여성특별위원회에는 급작스럽게 제도를 바꾸는데 대한 반대 의견 외에도 “남학생들은 여자대학에 갈 수 없지 않느냐. 남녀구분 모집을 없애려면 남자대학도 만들어야 그야말로 남녀평등이 아니냐”는 항의가 그치지 않았다.

“고교생 무렵 남자의 발육단계는 대체로 여자보다 3년이 느리다. 남학생에게 기회를 넓혀주지 않으면 보다 빨리 발육된 여학생들이 더 우수한 성적을 거둘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를 지켜보던 한 어머니는 “저이들 중에 남녀 쌍둥이를 가진 어머니가 있다면 어떤 태도를 보일지 궁금하다”고 하기도 했다.

군필자 가산점제도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내려진 뒤 군필자를 중심으로 일어난 거센 반대여론은 ‘본질적으로’ 이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음미대 남녀 구분모집은 ‘금쪽같은 내 아들’이 피해 보는 것을 볼 수 없는 어머니들이 나섰고, 이번에는 어머니들의 끔찍한 보호를 받고 자라난 아들들이 일어섰다는 점이 차이일까.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요는 남녀가 동등한 출발점에서 겨루는 것을, 그리하여 여성이 남성의 자리를 파고드는 것을 감정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얘기다.

헌재는 결정 당시 “병역의무는 국민이 마땅히 해야 할 신성한 의무일 뿐 특별한 희생으로서 보상해야 할 근거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으나 남성들은 잇단 군병역비리와 병영생활의 비효율성, 최근의 취업난으로 인한 피해의식까지 떠올리며 화살을 여성에게 돌린다. 이같은 ‘남심(男心)’을 겨냥, 정부여당에선 여성과 장애인은 사회봉사를 해야만 동등한 가산점을 받을 수 있으며 사기업에도 이를 권장할 방침이라는 안을 내놓았다. 그렇게 따진다면 사회에서 필요한 인력을 ‘생산’하는 여성에게도 가산점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올 판이다.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으로 꼽히는 자크 아탈리를 비롯, 21세기는 여성의 세기라고 예견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전문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여성 호르몬 또는 여성적 특성 아니마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조화, 따뜻한 관심과 지원 등을 갖게 한다. 그러나 경쟁과 전쟁, 등급과 서열매기기 등을 만드는 것은 남성 호르몬 또는 남성적 특성 아니무스다. 20세기는 땅을, 돈을, 파워를 얻기 위해 남을 억누르고 지배했던 남성의 세기였다.

더 이상 정복자나 지배자의 시대가 계속돼서는 안된다고 지적하는 이들은 배려와 조화의 여성성이 21세기를 이끌어갈 것으로 내다본다. 이러한 여성성은 여성만이 지닌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 모두의 가슴에 들어 있다. 다만 남성들은 그것을 억압해 왔을 뿐이다. 휘하에 ‘최후의 식민지’로 여성을 남겨두려 하면서. 이제는 남성 안의 여성성을, 식민지를 풀어줄 때가 되었다. 그래야 남성들의 ‘밀레니엄 버그’도 풀어진다.

김순덕<생활부차장>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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