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헌혈 126번 전상기 소방교

  • 입력 2000년 1월 7일 19시 53분


“내 몸안의 피가 누군가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생각에 헌혈 때마다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헌혈은 가장 평범하고 작은 사랑의 실천이 아닐까요.”

지난해 12월 29일 중앙혈액원에서 126번째의 헌혈을 마친 서울 능동소방파출소 소속 119대원 전상기(全相基·37)소방교. 현재 국내에서 120여차례 이상 헌혈을 한 사람은 30∼40명에 불과하다. 동료들 사이에서 ‘헌혈왕’으로 불리는 그가 헌혈에 남다른 관심을 쏟게 된 것은 19년 전 ‘작은 사고’가 계기였다.

“의형제처럼 지내던 한 친구가 군입대 전날밤 교통사고를 당해 위독한데 수술에 필요한 혈액이 부족하다는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병원으로 달려갔죠.” 그가 가장 먼저 병원에 도착해 수혈한 덕분에 친구는 무사히 수술을 받고 생명을 건질 수 있었던 것.

“우연히 하게 된 첫 헌혈이 꺼져가는 친구의 생명을 구한 셈이죠.” 이후 느낀 바가 본격적인 ‘헌혈 봉사’를 결심한 뒤 전소방교는 하루 한갑 이상 피우던 담배를 끊고 즐기던 술과 커피도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꺼져가는 생명을 구하는 데 쓰일 고귀한 혈액인 만큼 가능한 한 깨끗한 피를 헌혈하기 위해 스스로 건강관리에 나선 것. 86년 소방관생활을 시작한 뒤에도 전소방교의 헌혈봉사는 계속됐고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부 의료기관에서는 급할 때 ‘SOS’를 요청할 정도가 됐다.

“얼마전 자정 넘어 수술을 앞둔 한 백혈병 환자의 A형 혈소판이 부족하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가 헌혈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전소방교가 현재 갖고 있는 헌혈증은 100여장. 2년전 봉사활동을 나갔던 복지시설의 한 장애인의 부친이 폐암수술을 앞두고 형편이 어려워 필요한 혈액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직접 찾아가 20여장을 무상으로 전달했기 때문이다.

현재 다회헌혈봉사단 회원으로 한달에 한 차례씩 가두 헌혈캠페인에도 빠짐없이 참가하는 전소방교는 머쓱한 표정으로 등돌리는 시민들을 볼 때마다 최근 혈액수입이 급증했다는 보도가 머릿속에 겹치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 ‘대가없는 사랑나누기’인 헌혈에 보다 많은 이웃들이 동참해 따뜻한 겨울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전소방교의 작은 새해소망이다.

<윤상호기자>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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