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258)

  • 입력 1999년 10월 29일 19시 47분


그것을 알면서도 나의 부재를 확인하기 위해 나는 다시 바깥으로 외출을 나가려 한다. 그들은 나에게 그곳으로 돌아가는 길을 확인 시키고 연습 시키려고 하지 않는가.

옷 갈아 입히고 출발하지.

주임이 말하자 일행이 될 교사가 작업복 한 벌을 내놓는다.

이거 방금 세탁부에서 타왔는데요. 맞을라나 모르겠는데. 천사백…아니, 오현우씨 중은 작겠고 대 입으면 되나?

주머니가 많이 달린 진회색 작업복은 원래 사회에서는 새마을복으로 관공서에서 많이들 입었고 소에서는 외근자들이 입고 나가는 옷이었다.

여기 모자두 있어.

비슷한 회색 바탕에 재봉실로 새마을이라고 박은 모자도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혁대와 운동화도 있고 돈도 보였다. 주임이 말했다.

그 삼만원 오현우씨 영치금에서 찾은 거야. 지니고 있어요. 자 출발하지.

전에 병원에 나갔을 때처럼 지프가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계호할 사람은 전담반장인 주임과 교사 두 사람이었다. 그들도 모두 양복이나 점퍼를 걸친 민간인 차림이었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갔다. 지프가 당도한 것은 이 선생이 말하던대로 강을 건너서 시의 외곽에 새로 지었다는 고속버스 터미널 앞이었다. 주임이 안에서와는 다른 목소리로 말했다.

오 형 고속버스 타본지 오래 됐지요?

버스로 갑니까, 서울까지?

우리한테는 그게 제일 편하겠지. 논스톱이니까.

교사가 점퍼 안 주머니에서 표를 꺼내어 확인했다.

한 십 분쯤 남았네요.

대합실에서 우리를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텔레비젼이 잘 보이는 방향에 가서 앉았고 그들도 주위에 조금씩 떨어져 앉았다. 텔레비젼에서는 프로 야구를 중계하고 있다. 나는 야구 선수들 보다는 그 뒤의 관람석에 빼곡이 들어찬 관중들이 화면에 비칠 때마다 혹시나 하면서 재빠르게 살펴 보았다. 어디 아는 얼굴이라도 없을까. 함성이 터지고 공이 날아가고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질러대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거 한번 들어봐.

주임이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나는 전에 먹던 것인데도 어쩐지 낯설어서 잠깐 눈 앞에 들고서 이 물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궁리하고 앉아 있었다. 그렇지, 우선 포장지를 벗겨내야지. 포장지를 나선형으로 찢어 내려가자 과자로 싼 아이스크림 컵이 나타난다. 참, 먹을 것이 혀 끝에 닿는 맛이란 날카롭기도 하여라. 마치 뇌리를 콕 찌르듯이 그전에 어디선가 똑같은 동작으로 첫 입을 댔던 느낌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이 선생의 산동루 자장면처럼. 전쟁이 끝난 뒤 운동회 날에 어머니가 역 앞에서 사주었다. 아이스크림 장사꾼은 얼음이 가득찬 통에 끼운 작은 통을 빙빙 돌리면서 연신 떠들었다. 달고 시원한 아이스구리. 아이들은 속의 것을 다 빨아 먹고나서 눅눅해진 컵에 침을 잔뜩 적셔서 다른 아이의 등에다 살짝 붙여 놓곤 했다. 찬 걸 먹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먼 길을 떠날 걱정 때문에 그랬는지 소변이 마려웠다.

화장실에 갈 수 없을까요?

작은 거야, 큰 거야?

주임이 묻고나서 내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로 점퍼 차림의 교사에게 일렀다.

자네들이 계호해서 갔다와.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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