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파이낸스사태와 국가

  • 입력 1999년 9월 27일 18시 44분


수많은 시민이 피눈물을 흘리게 만든 이른바 ‘파이낸스 사태’는 시장과 국가의 관계에 대한 해묵은 논쟁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자생적(自生的) 질서’인 시장은 자의적인 규제와 정당화할 수 없는 특권을 남발하는 국가를 상대로 한 기나긴 싸움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했던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은 시장의 승리에 대한 최종적인 확인이었다. 수만 가지의 세분화된 직업이 있는 고도 분업사회의 생산활동을 국가가 전체적으로 계획하고 조정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며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장은 선이요, 국가는 악’이라는 극단적 자유주의자 또는 ‘광신적 시장론자’들의 추상적인 흑백논리가 객관적 진리로 승격되는 건 아니다. 시장의 효율성을 믿는다고 해서 반드시 국가의 ‘무장해제’를 요구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인위적 질서인 국가가 그런 것처럼 자생적 질서인 시장 역시 완전무결한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광신적 시장론자’들의 가치규범을 지배하는 이상은 완전한 경쟁시장이며 경제학 교과서는 충족될 수 없는 여러 가지 가정을 토대로 이것을 묘사한다. 가장 대표적인 전제조건이 ‘완전한 정보’와 ‘시장 투명성’이다. 경제적 선택에 필요한 정보가 모두 공개돼 있고 공급자와 수요자, 투자자와 기업경영자 등 개별 경제주체들은 그 정보를 획득하고 분석할 수 있다는 가정이다. 그러나 ‘파이낸스 사태’에서 보듯 투자자들은 투자회사의 경영 상태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피땀 흘려 모은 돈을 맡겼다. 두자릿수 월수익률을 내세운 터무니없는 광고의 합리성 여부를 판단할 능력조차 없었다. 금융당국은 감독권한 밖의 시장이기 때문에 현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경제 저널리스트와 경제전문가들도 위계(僞計)와 사술(詐術)이 판치는 불투명한 지역 금융시장의 위험성에 대해 충분한 경고를 하지 않았다.

시장을 움직이는 힘은 이기적 욕망 충족을 추구하는 개인이다. 충족하고자 하는 욕망에 한계가 없는 것처럼 이윤 추구에 눈먼 개인이 사용하는 수단 방법에도 한계가 없다. 금융시장의 투자결정에는 높은 전문적 식견이 필요한데 소액투자자들이 정보를 획득하고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은 기관투자가나 기업에 견줄 수 없이 빈약하다. 이러한 ‘정보 불균형’을 어느 정도라도 완화하는 것은 국가의 임무이며 이를 위해서는 강력한 감독권과 법률적 제재수단을 가져야 한다. 현대전자 주가 조작과 같은 행위를 감시하고 규제할 국가기관이 없다고 생각해 보라. 시장의 힘을 예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시장과 국가는 서로 대립하면서 의존한다. 시장은 국가가 만든 제도의 틀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으며 자의적 규제와 개입으로 시장의 원리를 왜곡하는 국가는 몰락의 화를 피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시장의 불완전성이나 기능부전을 명분 삼아 규제의 그물을 던짐으로써 관료적 권력의 극대화를 꾀하는 행태를 맹렬하게 규탄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의 목소리는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시장에 맡기라’는 추상적 구호를 내세워 불완전한 시장을 보완하고 불공정한 경쟁과 독과점의 폐해를 시정하려는 국가의 모든 시도를 비난하는 ‘광신적 시장론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시장경제는 내버려둬야 번창하는 들꽃이 아니다.

유시민(시사평론가) denkmal@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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