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고엽제 후유증]파월장병들 병마에 신음

  • 입력 1999년 9월 1일 19시 28분


월남전이 한창이던 70년 7월 중순 베트남 중부 나트랑의 한 정글 수풀 위로 UH60헬기 한 대가 미세한 흰색 액체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미군이 또 제초제를 뿌리는군.”

살인적인 무더위 속에 매복중이던 백마부대 28연대 박한순일병(당시 25세) 등 파월 장병들은 이날 안개비처럼 흩뿌려지는 제초제를 고스란히 맞았다.

그로부터 29년. 귀국 이후 줄곧 하반신 마비와 췌장염, 당뇨 등으로 만신창이가 된 박씨는 지난달 31일 서울 강동구 둔촌동 한국보훈병원 병실의 한 침대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박씨는 93년 고엽제 후유증 6급 판정을 받았다.

올해로 월남전이 끝난 지 24년이 되었지만 수많은 참전자들은 지금도 전쟁이 가져다 준 ‘고엽제 병마’와 끝나지 않은 전투를 계속하고 있다.

★고엽제(枯葉劑)란

월남전 당시 미군이 적의 은신처인 정글을 없애기 위해 사용한 맹독성 제초제. 당시 노란색 드럼통에 담았다고 해서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약품은 245―T와 24―D라는 제초제를 1124:1로 섞어서 만든 것으로 이때 발생하는 다이옥신 성분이 고엽제 피해의 ‘주범’. 대부분의 참전자들은 “살포한 지 3시간만에 잎이 타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한다.

미국은 1962년부터 1972년까지 10년간 총 1900만갤런 상당의 에이전트 오렌지를 살포했고 그 중 약 80%가 한국군 작전지역에 집중적으로 뿌려진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 실태

피해자 대부분은 귀국 후 지금까지 각종 피부질환과 신체마비 증상을 겪고 있으며 암이나 정신질환 등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다.

93년 2월 ‘고엽제 후유증 치료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뒤 올 5월까지 국가보훈처에 피해신청을 한 참전자는 3만9882명. 이들 중 1만8773명이 고엽제 피해자로 등록됐고 1만3457명이 비해당자 판정을 받았으며 나머지 7651명은 검진이 진행중이다.

고엽제 피해판정은 크게 ‘후유증’과 ‘후유의증’으로 나뉘는데 후유증은 고엽제와 직접 연관이 있다고 밝혀진 12종의 질병을 앓고 있는 2462명의 환자가 해당된다.

이들에게는 치료비 전액면제(보훈병원 이용시)와 등급에 따라 매달 46만∼210만원의 연금 및 자녀학자금 지원, 취업알선 등 국가유공자에 준하는 혜택이 주어진다.

반면 고엽제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으나 후유증으로 ‘의심’되는 21종의 질병을 앓고 있는 1만6311명의 후유의증 환자에게는 매월 20만∼40만원의 수당과 자녀교육비 지원 및 취업 알선이 전부다.

★논란

지난달 25일 7000여명의 회원들이 상경시위를 벌인 사단법인 ‘월남전 고엽제 후유의증 전우회’(총회장 이형규·李亨揆) 등 관련단체들은 후유의증 환자도 후유증 환자에 준하는 대우를 해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이 단체 강창규(姜昌圭)홍보국장은 “후유의증 환자 상당수가 가족들에게조차 사실을 숨기고 있으며 일부는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같은 요구에 대해 당국은 난색을 표하는 입장. 국가보훈처 의료지원과 박인규(朴仁圭)사무관은 “전체 후유의증 환자의 절반 이상이 고혈압 당뇨 등 일반 질병의 환자인 점을 감안할 때 이들을 모두 후유증 환자로 판정하는 것은 현 의료여건상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문제점

70년대 후반부터 25만여명의 고엽제 피해자들에 대한 정부차원의 역학조사에 착수했던 미국과는 대조적으로 국내에서는 95년에야 보훈처 주관으로 첫 역학조사가 실시됐다.

따라서 현재 질병에 따른 국내의 피해 인정기준은 당시 미국 국립과학원(NAS)의 조사기준을 대부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이에 대해 피해자들은 “미국과 고엽제 노출 정도가 다르고 인종학적인 특수성을 감안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협소한 판정기준을 따르다보니 실제 피해자들이 후유증 판정을 못받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주장한다.

〈윤상호기자〉ysh1005@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