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한수산/'거짓말'청문회

  • 입력 1999년 8월 25일 21시 56분


진실이란 무엇인가.

청문회장에 나온 증인들이 거론한 성경으로 이야기하자면, 구약(舊約)에서의 진실이란, ‘확실함’과 ‘견고한 것’을 의미한다. 또한 신약(新約)적 해석으로 이것은 숨기지 않는 ‘드러냄’이다.

기독교적 해석에 따르자면, 인간이 가지는 진실이란 우리가 신의 피조물인 ‘신의 것’임으로 해서 가질 수 있는 은총이다.

청문회를 지켜보며 묻고 싶었다. 저 입으로 신을 말하며 두렵지도 않은가. 진실과 허위란 말의 속성이지 본질의 속성이 아니다.

▼'능욕'당한 성경▼

말이 없는 곳에는 진실도 허위도 없다. 말이 있는 곳에서 ‘그것이 진실인가 허위인가’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 말들로 해서, 참으로 많은 것들이 능욕당했다. 그런 사흘이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그리고 그들이 손을 얹겠다고 주장하는 성경이 그렇게 능욕당했다.

그들 가운데 누군가는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었기에 그렇다.

어찌 그뿐이랴. ‘짜맞추기’였다는 검찰수사, 사직동 팀, 거기다가 신문에 실린 인터뷰 기사도 사실자체를 부정하는 증인들로 보자면 신문과 취재 기자까지, 이들 모두는 ‘날조’나 하는 집단이 된다.

문제를 이렇게 증폭시켜놓고 ‘이것으로 끝’이라면, 이 청문회는 무엇을 위한 무엇을 하자는 것이었던가.

이 사건이 이루어진 때가 어떤 시점이었나. 도덕적 긴장으로 충일해야 할 국민의 정부 탄생 1년이 되던 때였다.

경제상황은 또 얼마나 험악했던가. 거리에 노숙자가 넘치고, 그나마 직장에 목을 붙인 사람들도 급여가 깎여 주부들이 ‘어떻게 살라고!’하는 비명이 넘치던 때였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고위층이니 지도층이니 하는 말이 얼마나 허구인가는 그들의 부인들이 나서서 적나나하게 보여주었다.

그렇기에 그따위 ‘봉사활동’ 때려 치우라는 국민의 분노가 메아리처럼 뒤따르는 것이다.

봉사활동 이야기를 하는 고관 부인들을 보며 차라리 나는, 저 옛날 양지회라는 단체를 이끌며 광화문 네거리에서 장차관 부인들을 데리고 꽃을 심던 육영수 여사, 치마끈 질끈 동여매고 팔 걷어붙이고 꽃모종을 나르던 그 모습이 그리울 정도였다.

청문회에서 드러난 고위층 부인들이 보여준 가치관의 혼란은 그들의 가슴에 도사린 윤리적 공황이 어떠한가를 곳곳에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도덕적 자폐증이라고까지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다.

▼"진실은 묻힐 수 없다"▼

예로, 연정희씨, 아니 본인 스스로 그렇게 불러주기를 바라는 ‘화정이 엄마’의 말을 들어보자.

무엇보다도 윤리적 일관성이 없다.

이 분은 남편의 바깥일과는 담을 쌓고 살았고, 가족에게 쇠고기도 제대로 먹이지 못하며 청렴한 생활을 뒷받침했다고 한다.

그렇게 살았다는 그분이 2백만원의 ‘무슨 권’을 내고 몇 십만원의 거스름돈도 받지 않는다. 며칠 후에는 딸의 옷을 반납하고 자신의 옷을 사면서 정산(精算)같은 건 하지도 않는다.

더군다나 이분은 검찰 직원인 운전기사로 하여금 온갖 나들이에 자신을 모시도록 하며, 옷 반품 따위 심부름도 시켰다.

이것이 도덕적 자폐증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설명되어야 하는가.

자조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그래도 얻은 게 없는 건 아니다. 서민들에게 있어 앙드레 김은 ‘호화로움’의 상징이었다. 이 앙드레 김이 ‘구파발 출신 김봉남씨’라는 사실은 적어도 우리 모두를 유쾌하게 했다.

그가 그 나이에도 누구보다 젊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준 감탄과 김봉남이라는 이름이 준 친근감은, 한 사회의 상징에게 준 인간적 애정의 환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약속하고, 성경에 손을 얹는다고, 그것이 진실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토록 종교를 거론하던 분들에게 이 말을 돌려드리고 싶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시작하여 어떻게 일을 끝내실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구약 전도서 3―11)

결코 진실은 묻히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더욱 그렇다.

한수산<작가·세종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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