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택 칼럼]이회창총재 어디 있었나

  • 입력 1999년 8월 20일 21시 43분


아, 저런 게 관행이구나. 마치 임금이 신하들에게 하사금(下賜金) 주듯 명예총재가 소속 의원들에게 수백만원씩을 휴가비로 나눠주는 게 우리 정치판의 관행이란 거구나.

한쪽에서는 ‘부패방지’와 ‘정치개혁’을 외치는데 한쪽에서는 누가 엿볼까 ‘쉬쉬’하면서 돈 봉투와 보스에 대한 충성을 맞바꾼다. 금권정치 패거리정치 보스정치니 하는 ‘3金식정치’의 실례를 멀리서 찾으려 할 필요가 없다. 김종필(金鍾泌·JP)총리의 이른바 ‘오리발 파문’은 3김식정치의 ‘구태’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3김’이란 말에 당사자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이유를 들어 반박한다. 특히 김대중(金大中·DJ)대통령측의 신경이 날카로운 것 같다. 오죽했으면 여권에서는 친DJ학자들에게 DJ와 김영삼(金泳三·YS)전대통령의 차별성을 적극 부각시키고 3김정치청산론을 반박하라는 주문을 했다는 보도다. 이때문인지 요즘 몇몇 학자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 심기 불편한 與圈

그런가 하면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가 최근 ‘3김정치 청산 및 장기집권저지위원회’ 위원장을 임명했다는 얘기를 들은 국민회의도 발끈했다. 이영일(李榮一)대변인의 논평을 보면 여권의 불편한 심기를 헤아릴 수 있다.

“…전세계 어느 나라에 이처럼 해괴한 명칭의 당기구가 있을까. 이회창총재가 내심 3김청산을 원한다 해도 그 기구의 명칭만은 ‘정치발전위원회’정도로 포장했더라면 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YS측이 내놓는 3김차별론이다. YS측의 박종웅(朴鍾雄)의원은 최근 한나라당 당무회의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내각제 약속을 어기고 우리의 정치를 파행으로 몰고간 장본인이 김대중대통령과 김종필총리이고 이에 맞서 정치개혁을 외친 사람이 김영삼전대통령인데, 이 세 사람을 싸잡아 3김정치청산이라고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3김’이란 말에 대해 가장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측은 DJ다. DJ측은 얼마전 YS가 사실상 정치재개를 선언한 것을 계기로 ‘3김’ 얘기가 자주 나오자 YS와의 차별성을 누누이 강조했다. ‘환란의 주범’과 ‘환란을 극복한 사람’의 구별, 정치철학과 과정의 차별성 등을 내세웠다. 그러나 DJ가 정말 정치철학이나 역정 등에서 다른 두 김씨와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려면 YS보다는 JP와의 차별성을 먼저 얘기하는 게 설득력이 있을 법하다. 그러나 YS와의 차별만 강조하지 JP와의 차별은 말하지 않는다. DJ와 YS는 차이점이 많지만 공통점도 적지않다. 우선 군부독재와 맞서 민주화투쟁에 몸을 던졌다는 사실이다. 반면 JP는 민주화투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오히려 민주정부를 무력으로 쓰러뜨린 쿠데타의 주역으로 반민주적 정보정치 군부정치를 주도해왔고 여전히 ‘유신본당’을 자처한다. 어떤 면에서 JP는 민주화 시대의 정치무대에 설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며 3김의 한 축을 이루고 여전히 보스노릇을 하는 이유는 뭔가. YS와 DJ의 분열과 무한한 집권욕때문이다. 여기에 지역주의가 크게 작용했다. YS는 집권을 향한 3당합당과정에서 평소 비난해오던 JP세력과도 손을 잡았다. DJ도 오로지 당선만을 위해 정치철학이나 역정이 전혀 다른 JP와 연합전선을 폈다.

▼ 기회주의적 태도

여하튼 한나라당 이회창총재는 이런 3김과 자신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판단한 나머지 당내에 공식기구까지 설치했다. 그러나 최근 한나라당과 이총재의 태도를 보면 과연 3김청산을 주장할 자격이 있는지 묻고싶다.

한나라당이 진정 공당(公黨)이고 유일 야당이라면 정부의 주요정책이나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러나 전국에서 여론이 들끓은 김현철씨의 사면과정에서 한나라당과 이총재는 입을 다물었다. ‘예스’냐 ‘노’냐를 분명히 해야할 주제임에도 대변인은 애매모호한 논평만 간단히 냈다. “특정인에 대한 사면문제가 이렇게 국민적 논란거리가 된 것은 불행한 일이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길 바란다.”

여당인 국민회의와 자민련도 강도의 차이는 있으나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는데 야당인 한나라당의 태도가 이렇게 기회주의적일 수 있는가. 원칙주의자요 법치주의자라는 이총재와 한나라당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속 사정은 무엇인가. YS와의 관계? PK지역의 표? 정치현실? 이런 얄팍한 계산에 사로잡혀 있는 한 한나라당의 ‘제2창당’선언은 공허한 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3김정치 청산은 구호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어경택〈논설실장〉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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