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200)

  • 입력 1999년 8월 20일 18시 47분


다시 나직하고 느린 말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도부를 자처하면서 학생회의 조종과 내부적 문제에만 매달려온 결과 민족적이고 전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치투쟁도 수행하지 못하고 울타리 안을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모범적이고 과감한 희생이 없는 비합법적 지도부란 누가 누구에게 부여한 것입니까. 이제까지의 비공개 지도부 시스템을 비판하면서 새로이 시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쉰듯한 여성의 목소리.

조직은 투쟁을 통해서 태어나고 단련됩니다. 이제까지의 소극성과 분파성을 극복하고 연대 틀을 새로 짜야 할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투쟁의 단기적 대상을 정하여 그때 그때마다 연합하고 분담해서 수행해야 합니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일상화해서 견인할 준비위원회에서 위원회로 그리고 연합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제안합니다.

그 다음에도 토론과 회의는 끝없이 이어졌지만 나는 까무룩하게 잠들어 있었나 보다. 내 방의 유리문이 드르륵 하고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으니까. 송이 아까처럼 문턱에 걸터앉으면서 말을 걸었다.

떠메가도 모르겠구나. 봄두 아닌데 왜 그렇게 축 늘어져서 그래.

아, 몰라. 피로가 쌓였었나봐. 한 잠 자구나니 개운한데.

이리 좀 나와 봐.

나는 불이 훤히 켜진 화실로 나왔다. 모두들 돌아가고 없는데 천장의 형광등은 모조리 켜져 있었다. 나는 수강생들이 없을 때면 그런 기분나쁜 불빛이 싫어서 부지런히 끄고는 식탁 위의 백열등과 오디오 앞에 있는 스탠드만 켜놓는다. 다른 날처럼 얼른 형광등부터 껐다. 화실 안은 지저분하긴 했지만 그런대로 좀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송영태의 담배갑에서 한 개피를 꺼내어 재떨이를 찾는데 제법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 식탁 위도 치우고 간의의자들도 접어서 구석에 가지런히 세워 놓았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말했다.

제법이다. 청소까지 했잖아.

민폐를 끼치면 안되니까.

즈이가 무슨 독립군이라고 민폐라네.

그 녀석들이야 잔뜩 어질러 놓고 사라졌지. 우리가 치웠다.

우리라니…?

응 곧 올거야.

호랑이도 어떻다더니 바깥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였다. 뒷굽을 박듯이 힘을 주어 걸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칸막이의 통로로 누군가 들어왔다. 이쪽은 밝고 응접실 공간은 불이 꺼져 있어서 처음에는 실루엣만 보였다. 청바지에 긴팔 셔츠 차림이었고 머리는 단발을 했지만 분명히 여자였다. 그네는 한 팔에 안고 들어온 비닐 봉지를 우리 앞의 식탁 위에 얹어놓고는 젖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털어냈다.

뭐야 밖에 비 오니?

송영태의 물음에 그네가 여전히 머리를 털어내면서 발했다.

가을 비가 추적 추적.

나는 말없이 일어나 방안의 서랍장에서 새 수건 한 장을 꺼내다 그네에게 말없이 내밀어 주었다. 그네는 웃는 얼굴을 지어 보이며 수건을 받았다.

이거 민폐가 심한데요. 고맙심더.

뭐야 이치들은 말투까지 서로 닮는 걸까. 그네가 싹싹하게 고개를 까딱, 해보이며 내게 말을 걸었다.

최미경입니더. 지는예 송 선배의 새카만 후배라예.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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