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192)

  • 입력 1999년 8월 11일 18시 33분


지난번에 그 군의관 한다는 박 중윈가 하는 사람 보았다. 서글서글한 게 괜찮은 젊은이더라.

나는 정희에게서 전화로 얘기 들은 적이 있어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지요.

곧 제대한다니 내년에는 결혼을 시킬 작정이다만….

그 친구 좋은 사람이에요. 둘이 참 보기 좋던데.

너는…이제 어떻게 할 작정이니?

공부를 좀더 하고, 직업을 가져야겠지요.

느이 아버지 산에 계실 제 나두 한때 그렇게 생각했다. 혼자서 느이들 키우며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가겠다구. 그런데 아버지가 살아 돌아와 곁에 같이 있으니까 그전에 어떻게 혼자 살라구 맘 먹었는지 생각만 해두 앞이 캄캄하드라.

아버진 어머니 짐이 아니었어요?

짐이라니 그게 다 무슨 소리야. 가장이 있는 집은 집안 공기두 다른 법이다.

나는 문득 생각이 나서 어머니에게 말을 꺼냈어요.

형식이 중요하다면 나두 결혼할 수 있어요.

뭐? 누구랑 어떻게….

식은 못하는 거구 그냥 그이 호적에 올리는 옥중 결혼은 할 수 있대요.

그건 안돼. 절대루 안된다. 무기수는 앞으루 이십년 이상 살아야 감형의 기회가 온다더라.

어머니는 손가락으로 헤아려 보았어요.

이제 겨우 삼 년째야. 사람의 일생이란 별게 아니란다. 너까지 그럴 필요는 없어. 너 그이가 그렇게 좋고 못잊겠던?

나는 순간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어요. 그냥 이렇게 말했죠.

잘 모르겠어. 이젠 얼굴도 생각이 안나요. 그냥 살지 뭐.

초인종 소리가 들리고 아줌마와 함께 정희가 들어섰어요.

언니 왔구나.

오늘은 일 없어?

응 나 오늘 비번이야. 은결이는?

곁에서 아줌마가 말했어요.

새옷 입고 방금 잠들었어요.

새옷?

느이 언니가 추석빔으로 사왔대.

정희가 어머니와 나 사이에 앉으면서 말했어요.

언니 웬일이니? 어울리지 않게. 나두 오늘 백화점에 가서 몇 가지 사왔는데.

어머니와 아줌마가 자러 간 뒤에도 정희와 나는 그냥 주방 식탁 앞에 앉아서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일을 해서 그런지 정희는 어찌 보면 나보다도 더욱 성숙해 보여요. 책임감 있어 보이고 성격도 차분해지고 남의 말을 잘 들을 줄 알아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문가 특유의 무식한 편견이 없어 보여서 괜찮은 거예요.

너 송영태 잘 아니?

응 그냥, 박 선배 친구니까 좀 아는 편야. 전에 내가 언니한테 전화했잖아. 그 친구가 물어서 화실 가르쳐 줬다구. 내가 그 친구에 관해서 몇가지 얘기해줬을 텐데?

그랬어. 알구보니 나하구 같은 학번이더라.

그 사람 집안에서 돌연변이래. 공부는 꽤 잘했대. 운동에 빠지기 전까지는.

알 만해. 뭣 땜에 감옥 갔다가 왔지?

그 끔찍한 광주사태 터지고 나서 제일 먼저 시위를 일으킨 주동자였어. 그렇게 안 보이지?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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