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이회창의 槍

  • 입력 1999년 8월 10일 19시 37분


세상에 기연(奇緣)도 있고 악연(惡緣)도 있다지만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과 이회창(李會昌)한나라당 총재도 참 미묘한 인연이다. 다신 안 볼 것처럼 등을 돌렸다가 손을 잡기가 몇 차례. 그러던 인연이 이제 영영 끊길지, 아니면 지난 6년 세월 동안 그래왔듯이 끊길 듯하다가 다시 이어질지 당장은 점치기 쉽지 않은 일이다. 엊그제 이총재는 “3김 청산을 시대적 사명으로 인식하고 이 역사적 투쟁에 모든 것을 걸고 앞장설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정치를 재개한 YS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공격을 유보했다. 아직 그만한 인연의 끈은 남아 있다는 것일까.

▼ 잡은 손 뿌리치고▼

이회창총재는 ‘자리를 내던짐’으로써 ‘전국적 인물’이 된 사람이다. 88년 7월 노태우(盧泰愚)정권에서 제8대 중앙선거관리위원장에 임명된 이회창은 이듬해 10월 스스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해 4월 치러진 강원 동해, 서울 영등포을 재선거에서 “공명선거 풍토를 확립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는 것이었다. 특히 동해 재선거 당시 그는 선관위를 비난했던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에게 친필 경고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동해 재선거는 사실 YS에게는 뼈아픈 선거였다. 그의 측근이던 서석재(徐錫宰·현 국민회의의원)사무총장이 상대후보 매수사건으로 구속됐으니 당총재였던 그에게도 큰 오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고보면 YS와 이회창의 첫 인연은 악연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3당 합당으로 대통령에 오른 YS는 93년 2월 이회창을 감사원장에 앉혔고, 그해 12월에는 국무총리에 임명했다. 개혁정부의 ‘얼굴’로서 이회창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군에 대한 충성’에 익숙한 YS에게 총리의 권한을 앞세우는 이회창의 ‘대쪽 같은 소신’이 오래갈 수는 없었다. 94년 4월 이회창은 총리 자리도 전격 사퇴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장에 이어 국무총리 자리마저 과감히 내던진 이회창의 모습은 그 속사정이야 어떻든 ‘신선한 충격’으로 부각됐고, 그의 ‘대중적 인기’를 한껏 높이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결국 YS는 자신을 뿌리쳤던 그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96년 1월 이회창은 신한국당에 입당했고 97년 3월 신한국당 대표가 됐으며 7월에는 대통령후보가 됐다. 권력의 중심이 YS로부터 그에게로 기울었고 갈등을 보이던 YS는 결국 그해 11월 탈당했다. 이번에는 YS의 등이 떼밀린 셈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반목은 결과적으로 ‘승자(勝者)없는 게임’일 뿐이었다.

▼멀고도 험한 길▼

아무튼 이회창총재는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그것은 그가 더이상 ‘이미지의 정치’에 기댈 수만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실 그 자신이 더는 그렇게 불리기를 꺼린다는 ‘대쪽’의 이미지는 ‘정치인 이회창’에게 덕목(德目)만은 아니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총재가 편협하다고 말한다. 욕하면서 닮는다고 그가 어느새 3김의 독선을 따라가고 있다고 한다. 그가 경쟁의 게임보다는 제로섬 게임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당내 지도력과 대여(對與)정치력이 미흡하다는 비판도 그치지 않는다. 야당의 정체성도, 비전도 보여주지 못한다는 불만도 적지 않다. 그 과정이야 어떻든 측근이 연루된 ‘세풍(稅風)’은 그의 상대적 강점인 도덕성에 상처가 되고 있다. 지역적 기반이 없는 그로서 영남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현실정치적 한계도 무거운 짐이다. 이에 대해 이총재의 한 측근인사는 이렇게 항변했다.

“이회창씨가 한나라당총재가 된 것이 작년 8월말이다. 이제 1년인데 그동안은 현 집권세력의 ‘이회창 죽이기’에 대한 생존투쟁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편협하고 지도력이 없다고 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포용력과 지도력의 기준이란 3김식 정치행태가 아닌가. 이제는 새로운 정치적 사고방식, 새로운 행동양식이 필요할 때다. 어쨌든 실리 때문에 원칙을 훼손하지는 않겠다는 이총재의 의지는 확고하다.”

이회창총재는 ‘3김 청산’을 기치로 창(槍)을 곧추세웠다. 그 창이 과연 과녁을 제대로 꿰뚫을 수 있을 것인지. 그러자면 무엇보다 새로운 정치의 패러다임을 보여줘야 한다. 말만으로 ‘유일 대안(代案)’이 될 수는 없다. 멀고도 험한 길이다.

전진우<논설위원>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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