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이인길/대우사태 그 후…

  • 입력 1999년 8월 4일 19시 42분


그토록 조마조마해하며 걱정했던 ‘대우사태’가 소강상태에서 수습의 가닥을 잡은 것은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아직 모든 것을 낙관할 단계는 물론 아니지만 만신창이가 된 70조원의 부실덩어리를 ‘시장’이라는 수술대에 올려 집도(執刀)할 기회를 잡은 것만은 분명하다.

예측불허의 폭발성과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대우사태가 파국적인 상황까지 가지 않은 것은 두가지 요인이 절묘하게 작용했다.

첫째는 모처럼 정부의 기민한 초기대응이 돋보였다. 이번 경우 사태인식이 기아 때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빨랐다. 그리고 감추지도 않았다.

기자가 알고 있는 관료집단은 결코 모험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위기상황이 닥쳐도 규정을 따져보고 책임을 먼저 생각하지 리스크를 무릅쓰고 활로를 찾는 관료를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달랐다. 문제가 터지자마자 확실하고 강력한 액션 프로그램이 나왔다. 시장(市場)에서 잠깐동안 ‘긴가 민가’ 동요하다가 얼마안가 진정된 배경도 정부의 공개적인 처리방향과 투명성이 주효한 결과일 것이다.

둘째는 몰라보게 강해진 우리 경제의 탄력성을 꼽을 수 있다. 관점에 따라서는 금융시장의 동요현상을 한국경제의 회복기반이 허약한 증거로 비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70조원(약 600억달러)의 부채 문제가 터졌을 때 그것을 단번에 견뎌낼 경제는 이 세상엔 없다. 몇년전 미국에서 LTCM이란 금융회사가 40억달러의 투자손실을 본 것이 화근이 되어 월가가 발칵 뒤집힌 것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요약하면 우리경제의 견실한 회복기조가 여러가지 혼란징후를 제압할 만큼 탄력성이 강해졌다고 보면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대우사태의 해결을 낙관할 수 없는 데는 더 큰 이유가 있다. 냉정히 생각하면 지금시점에서 근본적인 문제는 아무 것도 해결된 것이 없다.

우선 대우위기가 터진 전후 시점을 주목해 봐야 한다. 올 3·4분기(7∼9월)는 생산과 투자지표가 큰 폭으로 상승하고 주가가 지수 1000을 넘으며 기분좋게 출발했지만 경제 전반에서 개혁후퇴조짐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실적이 조금 호전된 것을 기화로 기업의 구조개혁이 지지부진해지고 인수합병(M&A)과 자산매각을 망설이는 역효과가 광범위하게 생겨났다.

그 이면엔 정부 당국자들의 신중치 못한 언행(言行)이 이런 소동을 부추긴 측면도 적지 않다. 무슨 세미나니 조찬간담회니 하는 데서 정책방향을 설명하는 것까지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미묘한 시점에 민감한 사안에 대해 너무 말이 많은 게 탈이다. 말이 많다 보면 할말 안할말 속도 조절이 안되고 이때문에 극심한 시장혼란을 수도 없이 겪지 않았는가.

뭐가 좀 된다 싶으면 모든 것을 좋게 보고 낙관론에 빠져 일을 그르치는 한국의 악습적인 순환구조를 여기서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연장선에서 보면 대우사태는 방심하고 이완된 정부당국자와 시장 참여자들의 들뜬 분위기에 경종을 울려준다.

대우사태의 본질은 신뢰성의 위기에서 출발했다. 김우중회장 스스로는 “잘해 보려다 운이 나빴다”고 여길지 모르나 ‘대우몰락’은 과도한 부채성장과 신뢰를 상실한 그 자신의 업보다. 대우로 인해 정부의 부실기업처리원칙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조단위의 구제금융이 결국 국민부담으로 귀착되는 책임에서 결코 그는 벗어날 수 없다.

대외에 약속한 대우의 구조조정을 누가 주도하든 그것은 별로 중요치 않다. 정부가 감독책임을 선언한 이상 ‘또 누구 때문에 실패했다’는 소리는 듣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인길<경제부장>kung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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