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161)

  • 입력 1999년 7월 6일 19시 50분


정희가 시선은 아이를 보면서도 한 손의 손가락들을 꼼지락대며 움직이더니 방바닥을 짚고 있는 내 손 위에 얹었어요. 그네는 갑자기 내 손을 꼬옥 쥐더군요. 나는 웃는 얼굴로 정희를 보았구요. 사모님이 혼잣말로 한마디 했어요.

살결은 즈그 아부질 탁혔는가 좀 까모잡잡한 편여 잉. 그려도 시방은 그것이 멋이라더만.

우리 자매는 아무 말도 없이 그러고 앉아 있었습니다. 사모님 생각에도 쓸데없는 말을 꺼냈다고 느꼈던지 아니면 우리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한숨을 길게 한번 내쉬고는 일어났습니다.

아이고오 나는 가봐야 쓰것다.

가시게요?

하고 내가 물으니까 그네는 우리 분위기에 맞게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지요.

잉 그랑께 저 머시기 동상도 오고 했은께에 저녁일랑 아래 내레와 묵소.

아니 우린 괜찮아요. 할 얘기도 많구 그래서….

그려 그려, 편헌대로 허소.

그네가 서둘러 방에서 나가자 정희는 내게 말을 걸었어요.

어때?

나는 뭐가 어떻다는 말이냐는 뜻으로 동생을 보며 웃어 주었구요.

고생했지?

아니…누구나 겪는 일인데 뭐.

쟤 이름을 은결이루 지었다구?

그래, 하루종일 우리말 사전 들고 씨름했다.

나두 이담에 딸 낳으면 금결이루 지어야겠다?

하고나서 정희는 이제까지 참아왔던 물음을 한꺼번에 터뜨리듯 물었어요.

도대체 언닌…이 지경이 되어서도 왜 식구들한테 연락을 안했어? 그 시인이라는 엉터리는 어디루 간 거야? 그에게는 알렸어?

나는 정희의 입을 잠깐이라도 막아 두려고 말길을 돌렸습니다.

너 커피 한 잔 줄까? 일루 나와.

내가 먼저 쪽문을 열고 부엌 봉당겸 작업실로 쓰는 데로 내려갔고 정희에게 간이의자를 권했지요. 나는 그 애가 주위에 널려진 캔버스며 화구들을 둘러볼 동안 커피를 끓였어요. 내가 커피를 타서 그네에게 내밀자 정희는 찻잔과 받침을 받아들고 한모금씩 마시면서 구석에 세워진 작년 가을의 초상을 돌아보았어요.

저 사람이야?

그릴려구 했는데, 아직 안끝났어.

미안해…언니.아직도난잘 이해가 안가니까.

아니 괜찮아. 저 사람 지금 무기징역 형을 살기 시작했어.

어머나…무슨 짓을 했길래? 뭐라구 그랬어 언니. 무기라면 평생을 감옥에서 지내라는 거 아닌가?

아마 그럴거야.

동생은 커피를 조금씩 마시면서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더군요.

참 모르겠어.

뭐가?

언젠가 책에서 읽었는데 아이들은 자라면서 부모가 지녔던 인생의 한계를 그대루 물려 받을뿐만 아니라 그들의 약점을 자기 것으루 사랑하게 된대. 언닌 아버지 때문에 이렇게 된 거 아닌가 몰라.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언니두 같은 이념이었어?

꼭 같지는 않지만 찬동하는 면이 있지. 이념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니? 부자들이나 독재자에게도.

저 봐, 그건 그 사람 말투였어?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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