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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6월 22일 19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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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진은 차를 타고 강남으로 향했다. 번화가에 이르러 한 여성이 타고 있는 외제차를 ‘표적’으로 삼아 미행한다. 여성이 뒷자리에 혼자 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 ‘기사 딸린 자가용’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여성은 미용실 고급의상실을 차례로 돌며 하루를 보낸다. 취재진은 이 광경을 카메라에 담은 뒤 차량번호를 토대로 차량 소유주를 추적한다. 한 회사 소유라는 것을 알아낸 취재진은 회사로 전화를 건다. 회사측은 평소 회사 오너의 부인이 타고다니는 차라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TV에서는 얼굴 차량번호 등 일부를 모자이크 처리했을 뿐 전 과정이 그대로 방영됐다.
이 프로는 부유층에 대한 괴롭힘이나 분풀이가 아니냐는 개운치 않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외제차를 굴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미행을 당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시청자들이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점이다. 이는 시청자 다수가 이런 취재방식에 은연중 동의한다는 얘기가 된다.
부유층에 대한 국민 반감은 여러 요인이 겹쳐 나타나고 있다. IMF 관리체제 이후 실업자가 거리에 넘쳐나고 생활수준이 크게 하락했는데도 부유층은 고금리에 이은 주가폭등으로 큰 이익을 남겼으며 따라서 전보다 더 부자가 됐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빈부격차 확대의 문제다. 여기에 ‘무전(無錢)입대 유전(有錢)면제’라는 신조어를 남긴 병역비리 사건, 재벌과 장관부인들이 함께 몰려다니며 밍크코트가 어쩌니 저쩌니 해가며 사치스럽게 살고 있음을 보여준 ‘옷 사건’ 등 서민들로 하여금 부유층 지도층의 부도덕성과 사회적 불평등을 실감하게 만든 일들이 잇따라 발생했다.
경제가 회복세에 있다고 하는데도 서민들에게 ‘체감 경기’가 별로 달라진 게 없는 점도 이들의 좌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평당 1000만원이 훨씬 넘는 아파트 분양이 며칠전부터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인기를 끄는가 하면 고급외제품 수입도 큰 폭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수많은 실업자들이 여전히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고 결식아동들은 점심시간 교실 한쪽에서 학교가 마련해준 ‘눈칫밥’을 먹고 있다. 모든 국민이 같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모르지만 이처럼 계층간에 천양지차가 나는 현실은 서민들로서는 받아들이기가 힘들 것이다.
우리도 선진국처럼 부유층이 돈을 어떻게 쓰든 상관않는 나라가 되려면 부자들이 솔선수범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실정에서 이들이 갑자기 반성하는 자세를 보이고 자신과 가족보다 국가와 사회를 먼저 생각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몸소 실천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차선책으로 소득 재분배 구조를 제도적으로 정착시키고 법을 엄정하게 집행하는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부자와 권력층이 서민과 똑같은 법의 잣대를 적용받고 어떤 부분에서는 오히려 부자들이 더 큰 의무와 책임을 지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부자일수록 납세 병역 등 각종 의무에서 잘 빠지고 나머지 계층에서 그 몫을 대신 떠맡는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이를테면 부자들이 가장 무서워해야 할 상속세 증여세는 ‘바보세’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고 있고 돈많은 자영업자들의 소득감추기는 죄의식조차 없이 당연한 것처럼 이뤄지고 있다. 소득 재분배 정책의 핵심으로 이자소득이 많은 부유층에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는 금융종합과세는 경기활성화를 이유로 계속 유보중이다. 부유한 자산가들에게 세금을 더 물리자는 취지의 보유과세 강화 계획도 실현되지 못한 채 해당부서의 서랍속에서 잠자고 있다.
이런 와중에 김대중 정부의 개혁이 한계에 다다른 느낌을 주는 것은 ‘경제정의’ ‘사회정의’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더 큰 실망감을 안겨준다. 여야간 정책 줄다리기에서도 서로 입을 맞추기라도 한듯 금융종합과세 같이 부유층 심기를 건드리는 부분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는 사이 몇몇 부자들은 이렇게 말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을지 모른다. ‘정권은 짧고 부자는 영원하다’고.
홍찬식<논설위원>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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