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여론조사와 民心

  • 입력 1999년 6월 3일 19시 13분


구한말 우리나라를 다녀간 서양인들의 견문록을 읽어보면 공통점이 한가지 발견된다. 한국인들은 거짓말을 잘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들이 이 땅에서 어떤 일을 겪었길래 이런 기록을 남겨 놓은 걸까. 일부 국내 학자들은 이에 대해 한국인의 체면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분석한다.

▽우리 체면문화의 단적인 예는 속마음과 밖으로 내놓는 말이 상반되는 경우다. 집에 쌀이 떨어져 끼니를 거르고 있어도 겉으로는 배부른 척 하는 게 우리네 ‘체면’이다. 그러나 이런 체면이 여론조사에서는 정확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여론조사기관으로부터 질문을 받을 때 속마음을 말하지 않고 다른 대답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서구의 통계이론이 한국에서는 잘 먹혀들지 않는다는 얘기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여론조사는 그 자체로도 한계를 지닌다. 통계학자들은 여론조사가 신뢰성을 갖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조사대상자 선정을 과학적으로 할 것과 조사과정의 중립성과 설문의 객관성 등을 요구하고 있다. 뒤집어 말하면 이런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여론조사는 허구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영어유머에 ‘거짓말’보다 한단계 위의 거짓말이 ‘새빨간 거짓말’, 그보다 더한 것이 ‘통계’라는 얘기가 있는 걸 보면 통계의 신빙성은 비교적 솔직한 서구사회에서도 논란이 되어온 듯하다.

▽‘옷 로비사건’과 관련해 김대중대통령은 김태정 법무장관을 그만 두게 할 수 없는 한가지 이유로 여론조사 결과를 들었다. 65%의 응답자들이 김장관의 즉각 퇴진에 반대했다는 것이다.피부로 느끼는 ‘민심’과는 사뭇 다르다. 그래서 시중에는 제대로 된 여론조사였느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의아스러운 점은 또 있다. 이런 조사 결과를 어떻게 대통령이 여과없이 받아들였는가 하는 점이다.

〈홍찬식 논설위원〉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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