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31)

  • 입력 1999년 6월 1일 19시 00분


주임이 그래도 동네에서 좀 민망했는지 그렇다는 시늉으로 고개를 희미하게 끄덕였다. 윤희가 나를 돌아다 보았고 내가 그네에게 주민증을 넘겨주자 그네는 자기 교사 신분증과 두 장으로 겹쳐서 흔들어 보였다.

잠깐요, 뭣 때문에 이러시는 거죠? 뭘 파악한다는 거예요?

예, 불쾌할 일이 하나토 없슴다. 우리로서는 관내에 새로운 주민이 오면 파악을 해둬야 함다아. 우리 지서으 기본 직무니께.

그는 윤희가 내준 증명서를 꼼꼼하게 들여다 보았다.

주소지가 인천이구만이라. 직업은 멋이다요?

에, 공부 중인데 지금 몸이 좀 안좋아서요.

여기 오래 기실건가요?

나 대신 윤희가 재빨리 말했다.

방학 동안에만 여기 계시다가 끝나면 돌아갈 거예요.

주임은 증명서를 돌려주었고 모자도 쓰지않은 맨 머리에 어색한 경례를 붙이면서 말했다.

실례가 많았슴다아. 양해하시쇼. 나라가 비상시국이라.

그가 자전거에 올라탔고 윤희는 울타리 입구로 나가 자전거가 멀어질 때까지 확인했다.

비상시국이래.

윤희가 마당 안으로 걸어 들어오며 주임의 말투를 흉내냈다. 갈뫼에서는 처음 겪는 검문이라 나는 몹시 긴장했었나보다. 내가 검거될 것 같아서가 아니라 이 작은 집의 평화가 끝날지도 모른다는 데서 불안이 안개처럼 내 주위를 감돌았다. 아, 그날부터 우리의 도시락이며 등산이며 산책과 언덕 너머 빨래터의 한가로움과 잔잔한 수면을 무심하게 내다보는 낚시질과 한없이 긴 오후의 낮잠과 밤 새 소리와 그리고 빗소리마저 끝장이었다. 윤희는 도시에까지 나가서 육법전서며 민법 형법 책이며 법률 서적들을 헌책방에서 가방 하나 가득 사왔다. 그리고 그것들을 방문을 열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앉은뱅이 책상 위에 가지런히 꽂아 두었다. 나는 윤희가 학교 가고 없을 때 점심을 먹고나서 낮잠을 청하기 전에 일부러 읽었다. 법조문들을 읽다보면 세상은 모두 하면 안되는 짓들로 가득 차서 마치 보이지 않는 그물이 하늘이며 땅이며 산과 마을을 뒤덮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무기력하게 잠이 오던 것이다.

나는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몰려와 볼 일을 보는 주말을 일부러 피해서 윤희가 출근한 다음에 느지막이 오랜만에 자장면도 먹을겸 읍내에 나갔다. 나의 안전점검은 최 전도사가 맡아 주기로 했던 터였다. 우선 긴장을 하고 점심을 먹을 필요는 없으니까 먼저 중국집에 들르기로 했다. 무싯날인데도 중국집에는 손님이 많았다. 아이를 셋이나 데려온 아줌마가 자장면과 짬뽕을 시켜 놓고 달래가며 먹이는 중이었다. 배달 자전거가 부리나케 드나들었고 주방 쪽에서는 반죽을 쳐대며 면발을 뽑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중국집의 어수선한 활기가 마음에 들었다. 물론 내가 시킨 건 학생 시절 이래로 자장 곱배기였다. 빈 탁자를 앞에 두고 건너편 자리를 넋없이 보고 앉았는데 손님이 쳐들고 있는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간첩단 검거’ 라는 검은 바탕의 하얀 활자가 큼직하게 보였다. 최동우라는 글자며 김건 그리고 아는 사람들의 이름들이 나오다가 그 손님의 손바닥에 가려져 더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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