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24)

  • 입력 1999년 5월 24일 18시 51분


그러다가 조난자는 바깥 세상이 궁금해지고 가족들 생각도 나서 굴 밖으로 나왔지. 그는 곧 제가 살던 나라로 돌아가 나머지 인생을 살아갔는데 꿈에도 못잊을 그 딴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거의 미칠 지경이었지. 그는 히말라야로 다시 찾아갔대. 하지만 눈속에 묻힌 작은 바위 틈을 끝내 찾지 못했어.

그래, 당신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예요? 설마 이 갈뫼가 그곳이라는 이야기를 하려했던 건 아니겠지요. 아니 오히려 그런 세상을 찾아 나서고 싶었다는 뜻이었겠죠. 그때만 하여도 세계는 여기처럼 두 쪽으로 갈라져 있어서 어느 편이나 불완전할지언정 미지의 세상을 향하여 그 가능성이 열려 있었던 셈이에요. 당신은 그런 얘기를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내 잠 자리로 파고들었어요. 당신은 웃통을 벗고 있어서 내가 얼결에 두 손을 당신의 등 뒤에 얹었을 때 탄탄한 어깨 근육이 느껴졌지요. 우리는 긴 입맞춤을 했어요. 당신은 그러면서 내 가슴을 우악스럽게 움켜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속옷을 벗겨 내렸구요. 다른 날보다도 당신의 행위는 훨씬 거칠고 격렬했거든요. 나는 숨이 턱에 닿고 저절로 소리도 질렀고 등에서부터 둔부를 거쳐서 발끝까지 짜릿한 느낌이 길게 퍼져 나가는 것 같았어요. 사냥터의 위험으로부터 동굴로 돌아온 원시인처럼 당신은 내게로 파고들었어요. 일이 다 끝났을 때, 나는 어쩐지 슬퍼져서 저절로 눈물이 흘러 나왔지요. 우리는 언젠가 가까운 장래에 헤어지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답니다. 당신은 사실은 세상 구경을 나갔던 것이 아니라 내게서 일단 떠났던 것이지요. 아버지나 당신이 선택했던 그 시대의 가치는 이러한 시간을 추상적인 자유에 머물게 하는 아주 하찮은 소시민적 영역이라고 깔보게 했잖아요. 당신과 나의 사랑은 이제 돛을 올리고 부두 연안을 벗어나기 시작한 배처럼 앞으로 무수한 폭풍과 파도와 항해의 날들을 거쳐서 대양을 건너야 할 거였어요. 이제 겨우 우리는 시작했을 따름인데. 추위와 눈보라와 어둠에 둘러싸인 어느 소설의 오두막이 생각났어요. 시인이 사랑하는 이를 재워 놓고 언 손을 녹여 가며 시를 쓰는 동안 바깥의 황량한 눈밭에서는 늑대들이 찾아와 배회하며 음산하게 울부짖지요.

다시 우리들의 일상이 전과 같이 계속 되었어요. 나는 텃밭을 만들기로 교활한 생각을 해냈구요. 마침 장날에 읍내에 나가서 고추며 가지 토마토 모종을 사 오고 갈아 엎은 밭에다 상추며 쑥갓이며 씨앗을 뿌렸고 거름 구덩이를 마련해서 호박도 심기로 하였어요.

우리 텃밭 만드는 게 어때요?

그래 왜 진작에 그 생각을 못했지?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리라고는 나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는데 말이 나오자마자 삽을 들고 나서는 모양을 보고 나도 마음이 놓였답니다. 당신이 삽을 박아 갈아 엎으면 나는 그 뒤를 따라다니며 호미로 덩어리진 흙을 잘게 부수어 펼치곤 했지요. 우리는 오후 내내 밭 고랑과 두렁을 만들었어요. 밭 주변에는 돌을 주워다 그럴듯하게 모양도 냈구요.

늦었지만 씨를 뿌리지 뭐.

그럼요, 하루에 두어 번씩 물만 부지런히 주면 금방 쑥쑥 자라날 거예요. 우리 꽃씨두 뿌려요.

읍내 나가서 모종을 사다가 심고 나뭇가지로 버팀대도 세워 주고 여러 종류의 일년초 꽃씨도 뿌렸어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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