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윤평중/다시 5·18을 맞으며

  • 입력 1999년 5월 17일 19시 28분


올해도 어김없이 5월의 그날이 다시 왔다. 이제 광주 민주항쟁의 희생자들은 초라하던 망월동 묘역 대신 새롭게 치장한 기념공원에서 열리는 성대한 예식을 내려다보게 될 것이다.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앞다투어 화려한 말의 성찬으로써 ‘5월 광주’를 기릴 것이다. 언론은 온갖 찬사로써 지면을 도배질할 것이다. 이제 ‘5월 광주’는 복권되었는가. 역사의 한 단계는 이로써 매듭지어졌는가. 돌이켜보면 역사에는 비약이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80년의 시점에서 볼 때 ‘5월 광주’는 완벽하게 패배한 듯이 보였다.

▼실망스런 DJ정부 ▼

그러나 그 꿈과 정신은 끊임없이 되살아나서 정치군인들을 내몰고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를 차례로 탄생시킨다.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한 한국 현대사의 정치적 무의식은 ‘5월 광주’로 소급되는 것이다.

현 정권은 국민의 정부임을 자임하며 ‘제2건국’을 내세우고 있다. 나아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외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국민의 정부에 대한 국민의 기대감은 빠르게 침식되고 있다. 각종 정책들의 난맥상은 준비된 정권이라는 구호를 공허하게 만든다. 우리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이후 국민의 정부에 위임한 혁명적 개혁이라는 역사적 과업은 집권층의 방향감각 상실과 기득권 세력의 거센 저항이 겹치면서 지리멸렬해져 있다.

외환위기 극복이라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경제정책의 허실을 따져보자. 국민의 정부는 재벌 및 금융기관 등의 구조개편, 자본시장 개방과 노동시장 유연화 등을 강도 높게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형평성과 노동자들의 권익이 일방적으로 침해당하고 있는 데 비해 재벌의 특권적 위상에는 큰 변화가 없는 현실은 민주주의적 시장경제의 구호를 무색하게 만든다.

예컨대 정부의 거듭된 경영개혁 촉구에도 불구하고 재벌총수들의 경영지배권은 더욱 강화되고 있으며 국가경제에서 5대 재벌이 차지하는 비율도 더 높아졌다. 정부와 공기업 개편은 지지부진한 반면에 노동자들과 중산층은 유례없는 고실업률과 사회안전망 미비로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는 어떠한가. 전 근대적 패거리 정치, 지역주의, 대통령 1인에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 정치의 후진성은 현 정권에 들어와서도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지금의 집권세력이 야당시절 내세웠던 부패방지법이나 특별검사제 등의 진보적 공약은 실종될 위기를 맞고 있다. 참여 민주주의의 미명아래 막대한 국가예산을 쓰면서 추진되는 제2건국위는 자생적 시민운동까지 오염시키면서 또 다른 관변 운동으로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

▼光州정신 승화시켜야 ▼

‘5월 광주’의 정신에 빚지고 있는 국민의 정부가 내딛는 최악의 행보는 5공 세력과의 정략적 연대가 될 것이다. 경제파탄의 책임을 통감해야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사사건건 국민의 정부를 발목잡는 야당의 치졸한 행태도 딱하기 그지없지만, 야당의 본거지를 공략하고 분열시키기 위해 5공 인사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국민의 정부는 국민을 우울하게 한다. 5공이 어떤 세력인가. 평화로운 민주운동을 총칼로 압살하고 집권해 단군이래 최대의 도둑질로 임기를 마감하지 않았는가. 땜질 비슷하게 법적 책임을 물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아직 한번도 ‘5월 광주’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한 적이 없지 않은가. 정권재창출도 좋지만 ‘5월 광주’를 계승한 국민의 정부가 어떻게 학살자들의 피묻은 손과 악수할 수 있는가.

‘5월 광주’는 결코 완전히 복권되지 않았다. 지역감정의 망령이 춤추고 정치적 야합이 난무하며, 실업자들의 한숨 소리가 거리를 가득 메울 때, ‘5월 광주’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내린다. 국민의 정부가 소수 연합정권의 한계에 매몰된 채, 천민자본주의 봉건적 정치행태 지역주의 등을 척결하는 역사적 과업으로부터 멀어져 갈 때 ‘5월 광주’의 얼굴은 일그러진다. 우리는 이제 엄중하게 다시 물어야 한다. 국민의 정부는 ‘5월 광주’의 정신을 이을 것인가, 아니면 배반할 것인가.

윤평중<한신대 교수·사회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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