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밀레니엄베스트]1670년 英 펜 재판

  • 입력 1999년 5월 12일 09시 20분


영국과 미국의 재판 전통을 가장 많이 변화시킨 것은 아마도 1670년에 런던에서 벌어졌던 윌리엄 펜의 재판일 것이다. 후에 펜실베이니아주를 일으켜 세운 펜과 그의 친구 윌리엄 미드는 런던 거리에서 퀘이커교의 교리를 설교한 죄로 기소되었다. 당시의 법은 영국 성공회를 유일한 합법 종교로 정해놓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25세였던 펜은 젊은이다운 패기가 넘쳤으며 10명의 재판관들을 솜씨있게 골탕먹이곤 했다. 그는 거의 모든 법적인 논점에 대해 까탈스럽게 물고늘어졌다.

두 사람의 공식적인 죄목은 런던 거리에서 ‘불법적이고 소란스럽게 회합을 가진 것’이었다. 원래 퀘이커 교도들의 모임은 매우 조용했으나 경찰관들은 이들이 하도 난폭하게 소요를 일으켜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고 거짓 증언을 했다. 이 증언이 있은 후 런던시장이면서 재판장이었던 스탈링은 배심원들에게 평결을 내리도록 명령했다.

1215년에 제정된 마그나 카르타는 ‘자유로운 시민은 법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량하고 법을 지키는 이웃 사람들의 선서에 의해서만 유죄 선고를 받을 수 있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배심원의 평결을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구절이 빠져 있었다. 그 결과 펜의 재판이 열릴 무렵에는 배심원들이 왕의 마음에 들지 않는 평결을 내렸을 때 재산을 몰수당하고 집이 불태워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심지어 심의를 오래 끌지 않도록 심의하는 동안 음식도 물도 화장실도 없는 방에 가둬두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펜과 미드의 사건을 맡은 배심원들은 두 사람이 무죄라는 평결을 내렸다. 펜이 거리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스탈링은 3일동안 네 번에 걸쳐 배심원들에게 자신이 지시한대로 평결을 내리도록 명령했다. 배심원들은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배심원실에서 화장실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스탈링의 명령을 거절했다. 분노한 재판관들은 배심원들에게 법정 모독죄로 벌금을 물리고 벌금을 낼 때까지 감옥에 가두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용감한 배심원단을 이끈 사람은 청교도인 에드워드 부셀이었다. 그는 모든 배심원의 벌금을 대신 내줄 수 있을 만큼 부유했지만 용감하게 지옥같은 감옥에 갇히는 편을 택했다. 그리고 민사법원에 인신보호영장을 청구했다.

결국 배심원들은 석방되었고, 이를 통해 배심원들이 정부의 보복을 두려워 하지 않고 피고를 무죄방면할 수 있는 명백한 권리가 확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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