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109)

  • 입력 1999년 5월 7일 19시 40분


가슴에 무엇인가 묵직한 덩어리가 치미는 것만 같았다. 아아, 나는 아직도 한참이나 먼 거리에 처져 있는 것이다. 지식인 냄새를 떨쳐 버리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데 눈에 뜨거운 물기가 고였다. 그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인채로 말을 끊었다. 순옥이가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하죠? 남들은 공부하고싶어도 돈이 없어서 국민학교두 못 마치구 일하러 서울로 오는데.

댁에 부모님들이나 순옥씨하구 친구들은 열심히 일하는데두 왜 못 살죠?

그야… 가난해서 그렇지요.

왜 가난한가요?

첨부터 가진 게 없었으니까요.

열심히 일하면 어떻게든 저축도 하고 밑천이 생겨야 하잖아요?

배우지 못했으니까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없으니 그렇잖아요.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이 없어두 열심히 일하면 누구나 잘 살 수 있는 세상이면 좋지 않겠습니까?

순옥은 말문이 막힌 듯 잠깐 침묵했다.

나도 그렇고 내 친구들도 그런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순옥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건… 너무 어려운 일이예요.

나도 그네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기로 마음 먹고 다른 쪽으로 말을 돌렸다.

나 오늘 통금 해제까지만 여기 있어두 될까요?

순옥이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경자는 낼 아침에 들어오고 아마 명순이는 박 씨 오빠 방에서 자구 올 거예요.

고맙습니다. 헌데 또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이따가 열 두 시 쯤에 아래 내려가서 박 형을 좀 불러다 줄래요?

여기루요?

아뇨, 저 위에 철봉대 있는 빈터쪽에요.

그러죠. 근데 괜찮겠어요?

그네는 걱정스럽게 물었는데 나는 성당 부근에서 숨가뿐 상황을 겪고 나서 버스를 타고 오면서도 사실은 줄곧 그 생각을 해왔던 거였다. 저들은 나를 선택할 것이다. 내가 믿으면 그들도 나를 저버리지 않으리라. 나는 나 자신을 점검하러 온 셈이었다. 순옥이가 일어났다.

저녁 안 드셨지요?

뭐, 괜찮아요.

우리 밤참으루 라면 많이 사다 놨어요. 얼른 끓여 올게요.

순옥이가 지핀 석유 곤로의 끄으름 냄새가 방안에 가득찼다. 나는 방 창문을 열었다. 열면서 내다보니 반달이 희부염하게 걸려 있었다.

통금이 시작 되는 열 두 시에 순옥이를 아래로 보내고 나는 언덕 맨 위의 바위가 있는 빈터로 올라갔다. 산 동네 사람들이 바쁜 일상에서도 아침마다 올라와 맨손 체조나 야호 소리를 내지르는 노천 체육관인 셈이었다. 한 가지 흠은 나무는 한 그루도 없고 잡초와 연탄재 무더기만 있어서 좀 삭막하다는 점이었다. 나는 빈터의 가운데에서 기다리지 않고 박이 올라올 언덕의 반대편에 있는 담 모퉁이에 기대어 그를 기다렸다. 거뭇한 사람 모습이 골목 사이로 나타났다. 좀 비틀거리는 걸 보니 취한 모양이었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빈터 주위를 둘러보고 바위가 있는 데로 걸어 올라와 털썩 주저앉았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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