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68)

  • 입력 1999년 3월 19일 18시 37분


나는 그의 얼굴을 알아 보았어요. 물론 보통 때에는 한번도 서로가 말을 건넨 적은 없었지만. 그는 나보다 두 학년 위였는데 여름에 더러운 와이셔츠만 입고 다닌 것 외에는 거의 봄 가을 겨울을 검게 물들인 군 작업복 차림이었어요. 신발은 물론 코가 하얗게 까지도록 신은 군용 워커였죠.

굳 모닝입니다. 아침 사 주러 오셨나요.

나 참 기가 막혀서. 완전히 복지원 수준이잖아. 혼잣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릴뻔 했지요.

여기서 잔 거예요?

대충 그렇게 말 대꾸를 해주었더니 넉살 좋게 대답해요.

여기가 요새 내 방입니다.

머 어디 출품 하시나 보죠?

밤샘 작업 하는줄 알고 나는 그렇게 심드렁하게 말해 주었어요.

갈 곳이 없어서, 학생은 학교가 집이니까.

아마 하숙비가 떨어졌겠지요. 그의 검은 작업복에는 여기 저기 군용 침낭에서 삐져나온 닭털이 허옇게 붙어 있어서 흙이 묻은 옷 보다 더 지저분해 보였어요. 이거 형 꺼예요?

하면서 나는 그의 발치에 던져져 있던 스케치 북을 집어 들쳐 보는데 다행히도 아무런 대꾸가 없겠죠. 나는 솔직히 그의 데생에서 충격을 받았어요. 우리는 그 때 석고상이나 고작해야 학교에서 고용한 모델들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는 전혀 엉뚱한 짓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요. 그는 거리로 나간 거예요. 지금 막 짐을 지고 일어서는 지게꾼 아저씨를 그렸는데 그의 용을 쓰는 얼굴 표정과 주름살이며 지게 작대기를 두 손에 불끈 쥔 손과 솟아오른 핏줄이며 단단히 딛은 발과 장딴지가 생생했어요. 아니면 서울역 근방인 듯 한데 가방과 보따리를 들고 이고 나서는 모녀를 그렸구요. 벤치에서 자고 있는 사람은 신문지를 덮었는데 흘러내린 신문지 사이로 얼굴 반쯤이 나와 있고 깡마른 광대뼈가 보였어요. 그 뒤에 담배 꽁초에 불을 붙이고 있는 남자가 보여요. 힘껏 빨아들이노라고 볼은 홀쭉한데 시선은 작은 성냥개비의 불꽃에 떨어지고 두 손은 동그랗게 움켜서 바람을 가리고 있어요. 대합실 의자에 앉아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젊은 아낙네. 부랑아인듯한 두 소년은 거의 외투처럼 보이는 어른의 상의를 걸치고 머리는 사방으로 뻗쳐 새 둥지를 틀었는데 뭔가 조잘대며 즐겁게 군고구마 같은 걸 먹고 있구요. 어쨌든 나는 신선한 느낌으로 홀린 듯이 그의 소묘들을 보았어요.

참, 좋은데요?

나는 계속해서 그의 화첩을 들치면서 혼자 소리로 말했어요. 그랬더니 그가 퉁명스럽게 되물었죠.

뭐가요. 어떻게 좋단 말요?

살아 있는 거 같애요.

그는 픽, 하면서 웃었어요. 고작 그런 말 밖에 할 수 없느냐고 냉소하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어요. 그가 말하더군요.

현장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나는 그 때 겨우 이 학년이었지만 이른바 미술대학의 실기라는 짓에 대해서 너무도 따분하고 지루하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렇죠, 도대체 생김새도 다르고 동시대 사람도 아닌 외국의 천여년 전 석고상이란 물체를 그대로 찍어내듯 그리는 게 무슨 실기가 되는지. 그걸로 점수까지 매기다니 기가 막혀.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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