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오래된 정원 (54)

  • 입력 1999년 3월 3일 19시 21분


우리는 작업실 쪽에 있던 부뚜막에다 찬장을 올려놓고 무쇠 솥에는 차마 아무 음식도 끓이지 못하고 물만 데우기로 했고 그네가 들고 온 석유 곤로에 냄비로 밥을 지었다. 아직 전기를 끌어오지 못하여 양초 두 개를 켜놓았다. 촛불을 밝혀 놓으니까 우리는 그야말로 벽지에 들어온 듯 했다. 마주앉아서 밥 한 가지 두부찌개와 신김치로 저녁을 먹었는데 떠돌아 다닌지 일년여 만에 집에 돌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윤희는 부뚜막 아래에서 머리를 감고 있었다. 그네는 머리를 아궁이 앞에 대고 빗으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앞으로 뭘 할 거예요?

윤희가 노래를 그치고 문득 내게 물었다.

다시 활동해야죠.

아니… 그런 거 말구, 뭔가 하구 싶은 게 있을 거 아녜요?

아주 오래 전에 시를 써 볼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요?

도피 중이죠.

윤희는 부뚜막 앞에서 일어나 쪽문 앞 찬마루에 걸터 앉았다.

시인이 되는 게 좋을 거예요. 관념이 지향점을 잃으면 우리 아버지 같은 인생이 되지요.

사람에게나 아니면 무슨… 풀꽃도 제 철이 있는 거 아닌가요? 아버님의 이십대가 그분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던 시절이었고, 살아 남는다면 그 뒤에는 그냥 사는 거요.

당신들은 왜 모두 그런가 몰라요. 마차 끄는 눈 가린 말처럼 시야를 앞으로만 내놓고 있지요.

먼 길을 가야하니까.

윤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빗은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고 콧날이 반들거리는 얼굴을 들어 나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네는 방으로 들어서서 쪽문을 닫고 이부자리를 깔았다. 그네가 이사 오면서 가져온 단 한채의 이불이었다.

이부자리가 이것 밖에 없어요. 담요는 너무 지저분해서 아까 빨았구요. 같이 잘 수 밖에 없네요.

윤희는 그렇게 말하고는 먼저 자리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머쓱해져서 그냥 윗목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기억나는 거 있으면 한번 외워 봐요.

뭘 말요….

시라는 물건 말예요.

기억나는 게 몇 구절 있지요. 소년기에 친구들하구 막걸리두 마셔 보구 백일장 내기두 했어요. 마침 가는비가 내리니까 읊어 보자구 했어요.

읊어 봐요.

비가 내린다 바람에 불려 대기가 젖는데 내가 봄비라고 이름 짓는다

그게 다예요?

또 있습니다. 이건 내가 지은 시구 다음 게 더 좋아요.

제목이 모두 봄비였어요?

봄 비 그러나 감자 밭을 적시기엔 아직 적다

한마디씩 읊었군요. 순 엉터리들.

그 친군 교통사고루 일찍 죽었어요. 시정은 원래 모자란 거요. 첨부터 세상에 없던 것이기두 하구요. 사춘기에는 더욱 거울 미로 같지요.

제법…, 누워서 얘기해요. 목이 아프잖아요.

나는 그네의 옆에 두어뼘쯤 떨어져서 눕는다. 우리는 천장에 촛불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바라보며 반듯이 누워 있었다. 뒤뜰에서 대숲이 바람에 서걱대는 소리가 들렸고 언제부턴가 찾아든 소쩍새가 고즈넉하게 한 마디씩 끊어서 울었다. 연달아 같은 가락으로 울 때 보다는 사이사이에 앞의 울림을 되풀이하는 변조가 더 속을 상하게 했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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