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92년 대선자금 밝히되 政爭 안된다

  • 입력 1999년 2월 5일 19시 10분


92년 대통령선거자금 문제로 정국이 다시 위태롭다. 전 한보그룹 총회장 정태수(鄭泰守)씨가 92년 대선 직전에 민자당 후보였던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에게 1백50억원을 직접 주었다고 여당 단독 경제청문회에서 증언했으나 김전대통령은 이를 전면 부인했다.

정씨 발언의 진위는 아직 속단할 수 없지만 기왕 불거진 이상 진상이 가려져야 한다. 그러나 이번 일이 무한정한 과거 들추기와 파괴적인 정쟁(政爭)으로 이어져서는 안된다.

97년1월의 한보그룹 부도사건은 그해 11월 환란(換亂)의 한 원인으로 지목돼 왔다. 한보에 대한 5조원대의 특혜대출과 그 배후의 정경유착 의혹은 김영삼정부 말기의 검찰수사와 한보청문회에서도 전모가 드러나지 않은 채 ‘깃털’ ‘몸통’ 시비만 남겼다. 이번 정씨 증언은 사실 여부를 떠나 한보사건 규명의 단서를 제공했다. 정씨 진술을 계기로 금융왜곡과 정경유착의 실상과 인과관계가 철저히 밝혀져야 한다.

그러자면 김전대통령이 어떤 식으로든 국민이 납득할 수 있게 소명해야 한다. 청문회에서 증언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사저(私邸)에서 측근을 통해 ‘사실무근’이라고만 발표해서 끝날 일이 아니다. 그러잖아도 김전대통령은 환란에 이르기까지의 중요정책 결정과정을 설명할 책무가 있다. 더구나 한보자금 수수 여부는 김전대통령이 국민 앞에 직접 해명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와 있다. 피하면 피할수록 의혹은 커지게 마련이다. 전직대통령다운 처신을 당부한다.

그러나 ‘자물통’이라던 정씨가 이번에 대선자금 제공을 시인한 데는 석연찮은 구석도 많다. 하필이면 여권과 김전대통령의 관계가 매우 악화된 시점이기에 더욱 그렇다. 특히 여권과 정씨의 ‘뒷거래’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터에 여당 간부가 정씨 ‘병보석’을 공언한 것은 개운치 않다. 만약 여당이 김전대통령을 압박하려는 정략적 계산에서 정씨 진술을 끌어냈다면 환란원인 규명이라는 청문회 본래취지에서 일탈해 정쟁의 악순환을 초래할 우려가 크다. 여당은 자계(自戒)해야 옳다.

이번 일이 정쟁으로 비화해서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라 안팎의 사정이 급박한 마당에 언제까지고 과거를 캐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구나 선거자금에 관해서는 어떤 정치인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규모의 차이와는 별도로 김대중(金大中)대통령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야당은 김대통령의 92년 대선자금도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문제로 여야가 폭로경쟁을 벌인다면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것이 뻔하다. 여(與)든 야(野)든 대선자금을 정쟁의 도구로 삼아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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