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재홍/궁지몰린 피노체트

  • 입력 1998년 11월 26일 19시 39분


칠레의 군사독재자로 수천명을 학살 고문 테러한 피노체트에게 채워진 족쇄가 더욱 옥죄어들게 됐다. 영국 최고법원격인 상원의 5인 재판부는 그에 대한 영국경찰의 체포가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다시 법원의 판결을 받아야 하지만 그의 신병은 체포영장을 발부해 놓고 있는 스페인에 넘겨질 가능성이 커졌다. 그의 사법처리를 주장하는 나라는 프랑스 독일 캐나다 등 11개국에 달한다.

▼세습귀족들로만 구성된 영국 상원 재판부가 그런 판결을 하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처음 두 의원은 피노체트의 면책특권이 인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번째로 나선 스타인경이 반인도적 범죄가 국제법상 면책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두명의 의원도 이 견해에 동조했다. 영국 BBC, 미국 CNN, 프랑스 LCI 같은 방송의 생중계도 재판부에 국제여론을 의식하게 했을 것이다.

▼통치권자 시절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를 제삼국이 처벌할 수 있다고 판결한 것은 사법사상이나 외교사적으로 획을 그을 만한 사건이다. 피노체트는 자신의 형사소추가 불가능하게 칠레헌법을 고쳐놓았다. 또 88년 국민투표에서 다수지지를 못받았지만 당시 44%가 그의 계속통치에 찬성했었다. 그런 주권국가적 틀을 깨고 국제사회가 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 이번 판결의 의미다.

▼이 판결이 불러올 외교적 논란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칠레의 이웃 아르헨티나 입장에서는 82년 포클랜드전쟁 당시 영국군의 살상행위를 잔혹범죄라고 주장할 수 있다. 당시 통치자인 대처총리나 엘리자베스2세여왕에게 피노체트와 똑같은 체포영장을 발부하지 말란 법도 없다는 것이다. 논쟁의 결론과 관계없이 “반인도적 인권범죄자는 지구상에 안식처가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과정이라면 의미있는 일이다.

〈김재홍 논설위원〉nieman9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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