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귀족들로만 구성된 영국 상원 재판부가 그런 판결을 하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처음 두 의원은 피노체트의 면책특권이 인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번째로 나선 스타인경이 반인도적 범죄가 국제법상 면책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두명의 의원도 이 견해에 동조했다. 영국 BBC, 미국 CNN, 프랑스 LCI 같은 방송의 생중계도 재판부에 국제여론을 의식하게 했을 것이다.
▼통치권자 시절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를 제삼국이 처벌할 수 있다고 판결한 것은 사법사상이나 외교사적으로 획을 그을 만한 사건이다. 피노체트는 자신의 형사소추가 불가능하게 칠레헌법을 고쳐놓았다. 또 88년 국민투표에서 다수지지를 못받았지만 당시 44%가 그의 계속통치에 찬성했었다. 그런 주권국가적 틀을 깨고 국제사회가 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 이번 판결의 의미다.
▼이 판결이 불러올 외교적 논란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칠레의 이웃 아르헨티나 입장에서는 82년 포클랜드전쟁 당시 영국군의 살상행위를 잔혹범죄라고 주장할 수 있다. 당시 통치자인 대처총리나 엘리자베스2세여왕에게 피노체트와 똑같은 체포영장을 발부하지 말란 법도 없다는 것이다. 논쟁의 결론과 관계없이 “반인도적 인권범죄자는 지구상에 안식처가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과정이라면 의미있는 일이다.
〈김재홍 논설위원〉nieman9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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