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59)

  • 입력 1998년 9월 24일 19시 03분


제3장 나에게 생긴 일 ②

그러나 나는 그가 사랑한다고 말할까봐 두려웠다. 두려워서 얼른 옷의 단추를 풀었다.

우울한 격정이 내 손을 떨리게 했다. 그도 얻어맞은 사람 같은 얼굴로 내 눈을 마주보며 옷을 벗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을 떠, 눈을 떠…. 그가 몇 번인가 눈을 감아버리는 나에게 명령했다. 그 행위는 내 몸을 너무나 깊은 흥분 상태로 빠뜨려 버렸다. 나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먼 먼 곳으로 날려가버렸다. 이젠 고통스러워하지 않으리라. 슬픔에 빠지지 않으리라, 잠을 자지도 않으리라…. 나는 이 세상의 일과 싸우지 않고 삶의 대립과 노역과 분진과 무관하게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살리라….

―당신….

나는 자신도 모르게 당신, 당신, 당신이라고 중얼거렸다.

바람에 날아오른 검은 깃털처럼 공중에 나부끼는 마음으로 나는 생각했다. 그를 사랑하게 된 첫 날이 언제였던가.

그가 차에 기름을 넣어준 뒤 괜찮으세요? 하고 물었을 때였던가. 그가 산딸기를 나의 흰색 스커트에 부어주었던 날이었던가. 국도변의 카 센타에서 그를 만나 바닷가 마을 끝의 멸치막 공터에서 낚시를 했던 그 날이었던가.

구름 모자 벗기 게임을 시작했던 ‘초원의 빛’이라는 해변 모텔에서였던가. 그의 가족들의 음성속에서 울려나온 그의 노래를 따로 구별해내며 마음이 아파 도마질을 멈추었던 그 날이었던가. 박쥐나무 숲길에서 그와 마주쳤던 그 짧은 순간, 혹은 수몰 마을의 커다란 나무 아래서 끝이 없을 것 같은 섹스를 하며 죽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 날이었던가…. 부희의 집 앞에서 규와 내가 처음으로 만난지 6개월 째였다.

… 먼 해안으로부터 태풍의 소식이 들렸다. 며칠 동안 계곡의 논 밭엔 급박하게 돌아가는 경운기와 콤바인 등 농기계 모터 소리가 해뜨기 전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하루종일 울렸다. 추수된 곡식은 농부들의 서툰 운전 솜씨로 트럭에 실려 그들의 안마당과 창고로 날라졌고 단 사흘 사이에 들판은 텅 비어 머릿속 가르마 같은 흰 들길과 논바닥이 드러났다. 그리고 사락 사락 비가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찌나 고요하게 왔는지, 비가 오는 게 아니라 따뜻한 눈이 내리는 것 같았다. 비는 너무나 가늘어 한동안은 오랜 가뭄에 풀썩 풀썩 메마른 흙길과 먼지에 덮인 나뭇잎 속으로 스며들지 못했다.

그러나 어두워지면서부터 비는 거세어져 한밤에는 마을이 폭풍에 휩싸였다. 너무 깊은 밤이라 자다가 깨다가 하며 폭풍 소리를 듣기만 했다.

희부윰한 새벽에 깨어보니 비는 이미 그쳐 있고 나뭇잎과 부러진 가지들이 마당까지 날려와 쌓여 있었다. 오랜만에 계곡에 물 흐르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도 붉고 노란 나뭇잎들이 뒤섞인 흙탕물이 하천처럼 콸콸 흘러내렸다.

폭풍이 지나간 하늘은 물로 가득 채운 천장처럼 위태롭게 푸르렀다. 그 하늘가로 코끼리처럼 큰, 고래처럼 큰, 마을처럼 큰 구름이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아랫집 애선과 함께 장화를 신고 양동이를 들고 숲으로 들어가 밤과 가지째 떨어진 설익은 감들을 가득 주워왔다. 바람이 지나고 나면, 애선과 함께 마당가에 자리를 깔고 가을볕에 발목을 담그고 앉아 곶감을 만들 생각이었다. 조롱조롱 묶어 그늘에 말린 곶감을 눈 덮인 한 겨울 밤에 먹으면 깊은 가을의 태풍 냄새가 날 것이었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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