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 (73)

  • 입력 1998년 7월 17일 20시 21분


지금, 삼십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하게 기억할 수 있다. 두툼한 눈자위와 뭉툭한 코, 엷은 곰보가 진 얼굴과 비어져 나온 입술, 웃으면 빨갛게 드러나던 잇몸. 내가 화가라면 나는 그녀가 늙어가는 모습을 순차적으로 그릴 수도 있으리라. 왜냐하면 그녀는 내 인생의 첫사람이었으니까. 어떤 얼굴로 변한대도 나는 그녀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어머니와의 전화를 끊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전화기가 놓인 탁자 곁을 떠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후로 봉순이 언니의 방문이 그렇게 얼마간 성가시고 부자유스러울 만큼 나는 잘 자랐다. 아버지의 회사는 더욱 더 안정되어 갔고, 언니 오빠도 어머니의 원대로 잘 자라주었으니까. 우리는 더 넓은 아파트로 오년마다 한번씩 이사를 갔고, 나는 내 조숙함을 여전히 잘도 숨긴 채로 잘 자라났다. 그러니 아마 아버지의 바람대로 유학을 가고 대학 강단에 섰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필 내가 대학에 들어갔던 그해부터 최루탄이 그렇게 많이 터지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행복하게 자란, 앞 이마에서 머리가 예쁘게 곱슬거리던 남자와 결혼을 하고, 평생 상스러운 말 한마디 입에 달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었을 지 모른다. 그건 미국유학에서 돌아왔던 아버지의 오랜 바람이었다. 하지만 신의 바람도 있었다. 고맙게도 내게 여자로서 이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의 의미를 가르쳐주고, 제3세계, 식민지에서 자란 지식인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준, 모욕과 참담함과, 절망이라고 이름짓고 싶었던 순간들을 베풀어주신 신. 봉순이 언니는 그후에도 끊임없이 남자들과 도망을 치고 다시 혼자가 되어서 돌아왔다. 이제 이모나 어머니는 그에 대해 더 이상 길게 화제를 삼고 싶어하지도 않을 것이다. 원래 그런 아이였잖니, 거 뭐야 세탁소 그 말대가리같은 녀석하고 도망칠 때부터… 두 사람은 옛이야기 하듯 가끔 웃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녀가 한번 남자와 도망갈 때마다, 그녀가 얼마나 목숨을 걸고 낙관적이어야 했을지를. 이혼을 하고, 남자에 대해 비관적이고 비판적이며 신랄하게 결혼제도의 모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나말고, 그녀가, 남자 하나를 따라 나설 때마다, 얼마나, 목숨을 걸고 기필코 희망을 가져야 했는지를.

나는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전화를 끊기 전에 내가 짧게 어머니를 불렀던 이유가 그제서야 떠올랐다. 그건 오십이 다 된 나이에 남자랑 도망 갔다는 게 정말이예요 엄마, 라든가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건 아마도 이런 말이었을 것이다.

―며칠전 전철에서 한 여자를 보았어. 내 맞은 편에 앉아 더러운 보따리를 끼고 졸고 있는 여자였는데… 가끔 잠에서 깨어나 여기가 어딘가 둘러보는 거야. 내 생각엔 아마 그 여자가 좀 정신이 나간 것 같았거든… 냄새가 심하게 났는지 옆에 앉은 아가씨가 코를 싸쥐고 불쾌한 얼굴로 일어서더군. 어떤 살이 찐 중년의 신사가 염치를 무릅쓰고 그 옆에 앉긴 했는데 그도 피곤하지만 않다면 절대로 이런 여자 옆에는 앉아있고 싶지 않다는 그런 표정이었어… 그동안 전철은 내가 내릴 곳에 도착했어. 그러니까 사실 기회도 없긴 했던 거야. 게다가 내 인생이 요즘 얼마나 피곤해 있는 줄 엄마도 안다면… 그런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다가 문득 돌아봤을 때 놀랍게도 그녀가 날 바라보고 있었어. 설마, 하는 눈빛으로… 희미한 확신과 놀라움과 얼핏 스치는 그토록 반가움… 나는 돌아보지 않았어, 엄마… 너무 많은 세월이 지났고, 그녀의 얼굴이 가물거려서… 그래 그래서야, 삼십년이나 지났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게다가 아직도 버리지 않은 희망… 같은, 게… 그 눈빛에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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