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58)

  • 입력 1998년 6월 30일 19시 32분


내가 그런 것들을 읽고 있으면 가끔 봉순이 언니는 미자 언니가 피우던 담배도 몇 모금 피우고, 또 때로는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래도 난 진정 그 사람을 사랑했어! 소리치며 엉엉 울기도 했다.

―그러길래 사랑은 무슨 사랑, 사랑도 다 돈 있어야 하는 거지! 그렇게 한푼 없이 따라갔으니 어떤 남자가 좋아했겠니? 병식씨는 네가 정말 다이아라도 하나 갖고 나온 줄 알았던 거지. 그러길래 이것아 면사포 씌어 줄 때까지는 안된다고 버텼어야지.

눈물을 찔끔거리는 봉순이언니에게 면박을 주며, 그러나 미자 언니도 따라 울었다. 두 처녀는 겨울이 가고 새 봄이 오는 대청 마루에 걸터 앉아 내가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아마 미자 언니에게도 아픈 사랑의 과거가 있는가 보구나, 나는 생각했다. 그랬을 것이다. 두 젊은 처녀는 야속한 사랑 때문에 울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야속한 사랑은 아주 복잡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따뜻한 손길 한번 주지 않았던 부모와, 오로지 입 하나를 덜기 위해 보따리 싸가지고 서울로 올 때까지, 그렇게 가슴속에 빨갛게 조롱조롱 맺힌 아픔을 딛고 순정을 바친 첫사랑. 이상한 일은 두 처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주간지를 보고 있던 나도 공연히 따라 울었다는 것이다.

―얼라, 짱아, 넌 또 왜 우니?

미자 언니가 울다가 물었다. 그래, 난 또 왜 울었을까.

다른 이야기이지만 지난 가을인가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독후감 모집에 당선된 독자들 이십명과 사이판엘 간 적이 있었다. 간담회 시간에 한 여자가 일어나 내 소설의 여주인공 이야기를 하면서, 사실은 그 여자주인공의 어린 시절이 어쩌면 그렇게 자신과 비슷한지, 저희도 아버지가 딴 살림을 차리셨었거든요.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나쁜 아버님은 아니었습니다만, 어머니하고 저 그리고 제 여동생은 그것 때문에 그후 참 많은 아픔을… 라고 말하며 목이 콱 막혔다. 내 왼편에 앉아 사회를 보던 여성학자가 그러셨군요, 진정하시고 말을 해보세요, 그래서 이번 소설에서는 어떤 문제를 느끼셨는지, 까지 말하다가 갑자기 마이크를 내려놓더니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사회자의 말처럼 진정을 하고 다시 의견을 발표하려던 그 여자가 입술만 달싹이다가 끝내 참지 못하겠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했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표정으로 내가 오른편에 앉아 있던 진보적 잡지의 편집장을 바라보자, 그녀는 벌써 손수건까지 꺼내 흘러내린 눈물을 닦고 있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정면을 바라보니, 앞자리에 앉은 여성독자들 스무남은 명이 모두 눈물을 글썽이고 더러는 손수건을 꺼내들고 있었다. 아니 참 이상도 하네, 별로 슬픈 일도 아니고 흔한 이야기인데 왜들 이래요, 대단하게 울 일이 뭐 있어요, 어서 진행하시죠, 하고 말하려던 내 눈에서도 눈물이 금세 흘러 내렸다. 우리들은 한 삼분 여 동안 그렇게 각자 울었다. 이유는 없었다. 물론 이유는 많았겠지만.

공지영 글·오명희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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