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교육 19/논산 대건고]토요일은 책가방 없는 날

  • 입력 1998년 5월 25일 06시 36분


충남 논산 대건고 3학년 1반 학생 45명은 19일 하루동안 버스로 30분 거리인 논산시 연산면 송정리 한학마을을 찾았다. 이 학교가 강조하는 ‘예절교육’을 받기 위해서다. 이날은 모두들 ‘고3’의 중압감에서 벗어난 표정들이었다.

송정리 한학마을은 지리산 청학동처럼 옛것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도포차림에 갓을 쓰고 검은 수염을 기른 신명한문서당 권정수(權正洙·60)원장이 나타나자 웅성거리던 학생들은 갑자기 숙연해졌다. 모두 권원장을 향해 공손히 인사를 했다. 그런데도 권원장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학생들, 무슨 인사가 그런가. 지난번 내가 가르쳐준 인사법은 어디다 두고 왔는가. 배우고도 실천하지 않으면 군자의 도에 어긋나는 법일세. 자 다시 따라해보라고.”

권원장은 학생들의 자세를 이리저리 고쳐주면서 바른 인사법을 가르쳐주었다. 모두들 등을 일직선으로 평평하게 하고 큰절 연습을 하는 것이 생각보다 힘이 드는지 이마에서 구슬땀이 흘렀다. 이어 예절강의를 듣는 동안 제사와 종교의 갈등 등에 대해 질문이 쏟아지기도 했다.

대건고는 한 학년이 8학급인 인문계 고교이지만 색다른 특징이 하나 있다. 인성교육을 중시하면서도 학업성적이 높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토요일에는 책가방을 던져버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등교한다. 주중에는 열심히 공부한 뒤 토요일은 심성계발 프로그램과 각종 클럽활동을 통해 스트레스를 마음껏 푸는 날이다.

심성계발 프로그램은 30여가지나 있으며 졸업할 때까지 절반 이상을 거쳐야 한다. 상담프로그램의 경우 전문교육을 받은 학부모들이 직접 참여한다. 어머니와 함께 상담을 하기 때문에 교사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높다고 한다.

이중 눈길을 끄는 것은 ‘가치관 경매’. 학생들에게 가짜 화폐 1백만원을 나눠준 뒤 결혼 권력 우정 지식 가정 등 20개 가치 중에서 5가지를 경매를 통해 사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목표를 어디에 두고 살 것인지를 생각해보자는 취지다. 최고 액수를 써내 낙찰받은 학생은 왜 선택했는지 이유를 발표해야 한다.

‘만족스러운 종교생활’을 1백만원에 낙찰받은 경진이는 “그동안 너무 오만하게 살아온 것에 대한 반성과 하느님 앞에 겸손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병혁이는 “가치 경매를 통해 한꺼번에 여러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고 하나라도 제대로 성취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인류애 역사 자연환경 등 13개 주제의 영화 50편 중에서 매주 한편씩을 감상하고 교훈 등을 토론하는 ‘영화포럼’도 인기있는 프로그램.

대건고는 특별활동의 천국이기도 하다. 제빵 수상스키 볼링 도자기 사물놀이 탈춤 검도 에어로빅 등 53개 부서가 활동중인데 회원이 단 한명이라도 학교에서 인정해준다. 교내에 시설이 없으면 교외로 진출한다. 아마추어무선(HAM)반은 단 한명인 회원이 토요일엔 건양대 학생들의 모임에 나가고 있고 골프반도 한명이지만 학교측이 인근 골프장에 부탁, 레슨을 시킬 정도로 학교의 지원이 적극적이다.

이 학교는 80년대초까지만 해도 폭력이 난무하는 학교였다. 그러나 강석준(姜錫俊·48)신부가 교장으로 부임한 뒤 열린교육에 열성을 쏟고 인성교육을 강화하면서 학교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인간교육과 학력신장의 조화’를 교육이념으로 삼고 무엇이든 학생중심으로 운영한다. 판서를 없애는 대신 수업내용을 미리 인쇄물로 나눠주기 때문에 노트 대신 파일을 들고 다닌다. 절약된 시간을 이용해 토론식 수업을 하기 때문에 학습효과가 훨씬 높다는 것.

또 교과서를 그대로 쓰지않고 교사들이 직접 개발한 교재를 사용, 단계별 수업을 하고 있어 다른 부교재를 살 필요가 없다. 이 학교는 올해 졸업생 3백60명중 두명을 제외하고 모두 대학에 진학할 정도의 높은 진학률을 보이고 있다.

이 학교의 교육방식이 알려지면서 지난해 2백여 학교에서 방문, 연수를 받고 갈 정도로 ‘열린 교육’ 및 ‘인성교육’의 장이 됐다.

교사 한인성(韓仁星·41)씨는 “대부분의 학교들이 교육여건을 탓하며 옛날의 교육방식에 안주하는 것이 사실”이라며 “부족한 여건에서도 적극적으로 방안을 찾으면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논산〓이인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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