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16)

  • 입력 1998년 5월 16일 19시 58분


그 동네의 중간쯤에 위치한 제법 큰 한옥이 우리집이었다. 우리가 이사했을 때, 그 집에는 이미 다른 식구들이 세 가구나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침부터 회사로 나가시고 어머니도 가게를 처분하고 집에 계셨다.

봉순이 언니는 끼니 때마다 밥을 두 그릇씩이나 먹고 눌은 밥까지 먹어댔기 때문에 살이 통통히 올라 있었다.

하지만 봉순이 언니는 아직 학교에 가지 못했다. 정식학교는 아니지만 글씨도 배워주고 옷 만드는 법도 배워주는 그런 학교.

우리가 아랫동네로 이사온 후, 봉순이 언니는 우리 언니가 새하얀 줄이 선명한 세일러복을 입고, 중학교 입시를 잘한다는 미동국민학교로 갈 때마다 멍해졌지만, 신앙촌 아주머니가 집에 들러 가지가지 옷과 맨드라미처럼 붉은 내복과 구리무를 내놓고, 불룩한 몸뻬를 입은 미제 아주머니 배에서는 우리가 생전 보지못했던 초콜릿과 커피가 쏟아져 나왔지만 봉순이 언니는 집에만 있었다.

봉순이 언니에게 생전 잔소리를 하지 않던 어머니가 신경질을 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손님이 왔는데 벗긴 사과에 껍질이 남도록 엉망으로 깎아낸다거나, 토스트를 너무 바싹 태웠다거나 하는 잔소리였다.

어머니는 낮이면 밖에 나갔다가 새로 들여온 이상한 솥에 밀가루를 쪄서는 그걸 빵이라고 우리들에게 먹으라고 했다. 하지만 봉순이 언니는 밀가루는 절대로 먹지 않았다.

―저는 그냥 찬밥 먹을래요… 쌀이 없으믄 모를까, 그 좋은 밥 놔두구 웬 밀가루래유….

어머니는 봉순이 언니가 어머니가 요리학원에서 배워온 빵을 먹지 않는 것이 짜증스러운 듯했다.

―빵이 밥보다 얼마나 영양가가 높은데 그러니? 지금 나라에서도 분식하라고 난린데. 우리보다 잘사는 서양 사람들은 그 좋은 밥 안먹구 이 빵만 먹는다더라. 게다가 너만 밥을 먹겠다면 그럼 너 땜에 아침에도 밥을 해야 되잖니.

하지만 밥에 대해서만은 봉순이 언니는 완강했다. 밥을 먹고 간식으로 빵이나 국수를 먹으라면 또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어림도 없었다.

봉순이 언니는 저녁밥을 많이 지어 그것을 남겨 놓았다가 아침이면, 우리 가족이 상에 둘러앉아 토스트와 우유를 먹는 동안 주황색 플라스틱 바가지에 찬밥을 담아서 부엌으로 나갔다. 바가지에 담긴 찬밥을 국에 말아 부뚜막에 걸터앉아서는 후루룩 혼자 먹는 것이었다.

어쨌든 어머니와 아버지는 갑자기 서구식 생활을 결심한 듯했고, 이른아침이면 우리집까지 따뜻한 서울우유가 두 병이나 배달이 되었고, 마가린에 굽는 토스트 냄새가 번졌다. 또 가끔씩은 신식으로 새로나온 라면을 끓여 아침을 먹기도 했다.

어머니는 다우다 한복이나 융으로 만든 몸뻬를 벗고 길다란 월남치마를 입고 굽이 높은 슬리퍼를 신고 다녔다. 어머니의 머리가 잘려져나가고 구불구불해졌으며, 가발장사 아주머니가 오자 어머니는 봉순이 언니의 머리도 짧게 잘라 버렸다.

어머니는 갑자기 동창들을 만나러 다니기 시작했고, 어머니가 늘 손에 들고 있었던 책의 제목은 몇달이 지나도록 바뀌지 않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그 이후 내 어린 시절의 기억속에서 어머니는 언제나 부재중이었다.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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